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철든다는 것

굴레를 벗어나 2021. 7. 17. 16:08

시작하기 전에 분위기 풀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은 누구일까? 그야 철든 사람이다. 오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고 오신 분들이 참 많은 것 같다. 다이어트 안하나?

간단하게 제 소개부터 하겠다. 혹자는 직업과 나이로 자신을 정의하던데, 저는 조금 다르게 소개하고 싶다. 나는 웃을 때 안재욱 닮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기서 눈치챘겠지만 왕자병 증세가 조금 있다. 동시에 낯가림이 심하다. 그래서 100여명이나 모르는 사람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상당히 부담이 된다. 그런 제가 좋아하는 취미는 사진이다. 가만히 찍으면 되니까.

저는 사진을 찍을 때 어떻게 하면 잘 찍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깨달은 것이 ‘덜어 냄의 미학’이다.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잡다한 이것 저것을 넣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들을 빼야 한다. 안타까운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고 그간의 노력 때문에 차마 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과감하게 덜어내야 한다. 그래야 사진 속 이야기의 주제가 살아난다. 비워냄은 내 삶의 좌우명이 되었다. 화두가 되었다.

비단 사진뿐만 아니라 내 삶도 비워내야 삶을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공부를 안한다. 비워내야 하는데 자꾸 머리에 쌓이면 안되니까. 이건 웃자고 하는 얘기고.. 비워낸다는 것은 내가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나눠 준다는 뜻이다. 갈매기 꿈이라는 책 아시죠?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 라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사실 이 책은 2부의 내용이 핵심이다. ‘사랑은 자신의 삶의 깨닮음을 통해 다른 사람의 가슴 속에 숨어 있는 선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서로 비워내자. 서로 깨우친 바를 나누자. 그게 사랑이다.

그래서, 오늘 ‘철든다는 것’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이다. 이 책은 제가 초등학교 6학년때 사서 읽은 책이다. 여러분도 그 즈음에 읽었으리라 생각한다. 맞죠? 이 얇은 책은 쉽게 읽을 수 있다. 짬을 내면 2시간 만에 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제가 초등6학년때 부터 지금까지 계속 읽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면 나이들어서 읽다보면 몰랐던 부분을 또 다시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게 고전의 미학이다.

왜 이 책을 들고 나왔냐면 이 책은 ‘철들다’라는게 뭘까.. 그것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여러 분. 철든다는게 뭘까? 사전에 찾아보니 ‘사리를 분별하여 판단하는 힘이 생기다’ 라고 한다. 사실 이 어원이 재미있다. 여기서 ‘철’은 ‘계절’의 철이다. 그러니까 계절의 변화를 안다는 뜻이다. 이것은 단순하지가 않다. 계절의 변화를 안다는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우주의 조화와 섭리를 깨우친다는 거다. 우주와 나의 존재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란 존재가 우주의 빅뱅을 통해 나온 수소와 탄소의 한 알갱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이가 곧 나의 또 다른 분신임을 깨닫게 된다. 그게 철든다는 것이다.이처럼 ‘철든다’는 뜻을 생각하면 철드는 게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주인공 제제가 형에게 ‘철든다는게 뭐야? 대단한거야?’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러자 형은 구박을 합니다. 사실 이 주인공의 배경은 너무나 슬프다. 직업도 없고 술주정뱅이 아빠에게 매일 학대를 당한다. 이 책을 쓴 작가의 경험이 담긴 자서전적 소설이라고도 하는데, 매일이 지옥같았을 거다. 아버지가 술마시는 순간부터가 주인공에게는 공포로 다가왔을테다. 오죽하면 아빠에게 맞고 난 후 온 동네에 주인공이 죽었다고 소문까지 났을까.

형도 주인공을 괴롭힌다. 엄마도 그다지 도움이 안된다. 이 책에 등장하는 비중도 크지 않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살할꺼라고 이야기 한다. 그 때의 주인공 나이는 몇 살일까? 고작 5살이다. 5살 짜리가 자살하겠다고 하는 가정환경이 상상이 되나? 5살짜리가 하는 말을 들어보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아이’ 라고 한다. 자신이 ‘악마의 자식’이라고 얘기하는 5살짜리가 도대체 그려지지가 않는다.

그런 주인공은 라임 오렌지 나무에 밍기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말이 되기도 하고...이는 형이상학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주인공이 ‘유토피아’를 꿈꾸는거다. 가혹한 현실에 반발하여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거다. 문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메타포’라고 이야기 하는데 가혹한 현실과 행복한 이상을 연결해주는 그 매개체가 라임오렌지 나무이다.

그러다가 어떤 아저씨를 만나게 되고 여러 가지 따뜻한 위로를 받으면서 좀 더 삶을 따뜻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그냥 그렇게 그런 책이 될텐데, 역시나 유명한 작품은 엔딩이 쉽게 끝나질 않는다. 그 아저씨가 사고로 죽고 주인공은 다시 좌절을 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주인공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한다. 아저씨가 죽어서 슬퍼하는 주인공을 아빠가 위로한다. 평소에는 무시했던 라임오렌지나무를 인정하는 말을 한다. 그러자 주인공이 뭐라고 답하냐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는 죽었다’ 라고 답한다.

이 책의 서두에 주인공이 ‘철든다는 게 뭐냐’라는 질문이 이 책의 말미에 ‘라임오렌지 나무는 죽었다’는 답변과 대구를 이룬다. 이는 매우 중요하다. 문학적인 장치인데, 나는 이걸 발견하고 소름이 끼쳤다. 주인공이 이야기하는 철든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철든다는 것은 더 이상 상상에만 머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선언이다. 괴로울 때마다 라임오렌지 나무를 찾아가 말이라고 상상하며 놀던 것을 그만하고, 왜 내가 이렇게 괴로운지를 정면으로 바라보겠다는 거다.

제가 이 책을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었던 이유가 이거다. 세상에는 ‘철 없는 사람’이 너무 많다. 괴로울 때마다 나만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찾아가 상상만 하면서 정작 현실은 직시하지 않는다. 힘들 일이 생길 때 마다 핑계를 댄다.

우리 농인들도 마찬가지다. 인권침해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나는 글도 잘 모르고, 말을 잘 못하니 똑똑한 네가 나서봐’ 하고 뒤로 물러난다. 제가 대학시절도 그렇고 지금도 겪고 있다. 나서질 않는다. 자기만의 우물에 갖혀서 자기만의 라임 오렌지 나무에 올라 앉아서 생각만 한다. 이제는 철이 들어야 한다. 괴롭고 슬픈 현실이지만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유흥준은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이전의 것과 다르다’ 라고 했다. 이를 되짚어 보면 다른 세상을 보기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한다는 거다. 현실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거다.

주인공 제제는 ‘라임오렌지 나무가 죽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괴로운 현실을 정면으로 부딪치겠다고 선언을 한다. 그걸로 이 책이 끝나지만, 만약 이 책이 계속 이어진다면 주인공은 그 현실 때문에 더 슬프기도 하겠지만 자기 자신을 좀 더 따뜻하게 돌보고 위로할꺼라 믿는다. 주인공은 아버지에게서 매를 맞는 이유가 자기가 악마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했었지만, 철든 이후에는 그것이 자기 잘못 때문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독한 가난과 열악한 브라질 경제상황이 가정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은연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그걸 알게 된 이후의 주인공의 삶이 무척 궁금해지지 않나? 여러분도 한 번 상상해보시라.

둘째,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살겠다는 선언이다. 유명한 영화가 있다. 저는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운다. 내가 마치 위로를 받는 것 같기 때문이다. ‘굿 윌 헌팅’이라는 영화를 아시나? 학대로 마음의 문을 닫혀 있던 주인공이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다가 교수의 한 마디에 무너지고, 새롭게 재출발을 한다. 철든 거다. 주인공을 철들게 한 말이 ‘네 잘못이 아냐’ 였다. 그 이후로 주인공은 현실을 정면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고 그것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대학교수가 소개해주는 대기업 면접 자리도 박차고 오로지 자기 힘으로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한 여정에 떠난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는 매우 중요하다. 예수님이 이 땅에 전한 것들을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바울이다. 그 바울이 쓴 편지중의 하나가 고린도전서인데, 저는 개인적으로 기독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으면 ‘고린도 전서’를 먼저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고린도전서 중 13장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면 ‘실천’을 매우 강조를 한다. 너희가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꽹과리 일뿐이다라고 한다. 믿기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딱 잘라 이야기 한다. 사랑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13장 11절에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내가 알기를 어린 아이와 같이 알고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했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그 일을 버렸다 라고 한다. 즉 철든 후에는 행동이 달라졌다는거다. 알고 난 후에는 실천한다는 거다.

예를 들어 우리 청각장애인들 살아가기에 불편한 점이 많다. ARS문제도 그렇다. 수화통역도 그렇다. 불교에서는 이런 고통뿐인 현실을 언급하는 한문이 있다. ‘인생개고생’... 웃자고 하는 얘기다. 그럴 때 마다 누군가가 나를 구원해주겠지 하면서 라임오렌지 나무 밑에서 유토피아를 상상만 하고 있을 사람이 많다. 이는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는 거다. 청각장애가 우리 잘못이 아니듯이, 우리의 불편함 또한 우리 잘못이 아니다. 불편함은 도와줄 수 있지만, 부끄러움은 도와줄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생각하지 말고, 보라!’ 한다. 우리 청각장애인들은 ‘보는 사람’이다. ‘보고 실천하자.’ 부조리한 현실을 자각하고 적극적으로 싸워 나가자. 그게 철든 거다.

가을이 끝나면 곧 겨울이 온다. 철든 사람의 겨울은 철들기 전의 겨울과 전혀 다르다. 알고 난 후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겨울이 따뜻하다. 왜냐? 부조리한 현실을 알고 그것을 깨쳐 나가려는 전사의 뒷모습은 불길에 활활 타오르고 있을테니까. 모쪼록 여러분 모두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는 시간이 되길 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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