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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장애인이 교단에 선다는 것

굴레를 벗어나 2021. 7. 17. 15:12

얼마 전 아는 사람으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를 들어 본인이 교사 임용시험 면접관으로 들어갔을 경우, 아주 심한 뇌병변 1급 장애인을 유치부 교사로 채용을 하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주 심한 언어장애와 하루 종일 전동휠체어를 타야 하는 뇌병변 장애인을 유치부 교사로 맞이해야 하는 유치원생과 학부모들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질문이었지요. 실제로, 2014년 광주교육청에서 뇌병변 1급 장애인을 면접과정에서 최종 불합격 처리했었습니다.

 

언어를 배워야 하는 유치원 아이들이 심하게 어눌한 뇌병변 장애인 교사의 발음을 과연 알아들을 수 있을지 부터 시작해서, 장애인 교사에게 신체적 배려를 해줘야 상황이 때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들의 인내심이 어디까지 인지 등 수 많은 질문들이 그 날 집에 돌아와서도 끊기지 않았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또 어떻게 해야 할지도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애인이 교단에 선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이 자리를 빌러 한 번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오늘 날에서는 장애는 의료적, 도덕적 모델보다는 '사회적 구성주의'관점에서 이야기합니다. 즉, 장애란 단지 사람들이 지닌 손상이라는 측면을 통해서는 설명되고 이해될 수 없으며, 오히려 사회 제도의 측면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손상을 지닌 사람들의 제약된 기회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개인들이나 그들의 소위 무능력이 아니며, 거기에는 반드시 사회 또한 부분적으로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에서는 유전적, 신체적 장애, 감염성 질환, 강간, 근친, 모체의 생명 우선의 조건 하에서 임신중절이 허용되고 있습니다. 이 조문을 액면대로 해석하면 장애아는 신체적 장애의 경중 또는 생후 사회적 자립 예측과는 상관없이 '장애'의 유무만으로도 의학적 사형 선고를 받는 셈입니다. 그 판단의 근거로는 장애인은 사회에서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 때문이겠지요. 아마도 대다수는 이 낙태에 대해 반발하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럼, 질문을 바꿔서 임신 중 태아가 여자이거나 흑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도 낙태를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 사회는 옛날에 비해서 유해졌지만, 여전히 여성과 흑인은 '장애인'보다는 가벼울 지언정 여전히 차별적인 시선과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성폭력, 성차별 그리고 유리천장으로 표현되는 험난한 취업문은 여성의 삶이 오늘 날에도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성 또는 흑인과 장애인에 대한 낙태 유무에 대한 판단 결과는 매우 다릅니다.  

 

'장애'에 대한 낙태는 자연스러운데, '여성'이라는 이유로 하는 낙태는 불법으로 처벌까지 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 내면에는 '장애'에 대해 숨겨진 다른 잣대가 있는 걸까요? 여성과 장애인 모두 사회적 삶이 힘들 것이라는 동일한 기준 이외에 장애인에게만 적용되는 다른 잣대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장애인에게만 적용되는 그 묘한 잣대는 타당한 것일까요?

 

그 잣대는 아마도 '장애의 무능력'에 따른 '사회적 비용과 비극' 이겠지요. 발달장애아에 대한 양육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동반 자살한 부모 이야기는 언론에 자주 등장합니다. 때문에, '장애는 무능력'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에서 출발한 신화는 결국 비극에 다다를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때문에 장애인은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 만도 못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서두에 저에게 질문을 했던 지인도 '장애를 가진 자'가 가르치는 행위에 있어서 부분적이든, 전반적이든 '무능력'으로 지칭되는 어떠한 제한점이 있을 것이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 믿음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기존 장애인 교사의 보조공학기기 또는 보조인력 없이  업무 수행이 어려운 곤혹스런 모습을 관찰한 후에 얻은 본인만의 경험적인 결론일수도 있겠지요. 

 

장애인은 정말 무능한 사람일까요? 아니면, 사회적 성취를 거둔 장애인을 제외하고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장애인만 '무능한 사람'이라고 봐야하는 걸까요? 그래서 여기서 더 나아가 장애가 가벼운 일부만 교사로 받아들이고, 심한 장애를 가진 사람은 교사로 채용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요? 또한, 단순히 '장애인 의무고용률'이라는 법을 준수하기 위해 장애인을 교사로 채용하는 것 그 이상의 의미는 전혀 없는 걸까요?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어느 누구나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단계를 거쳐 자신의 장애와 직면합니다. 각 단계에서 중간에 멈추는가 하면, 모든 단계를 계속 반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분명히 이해를 해야 합니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은 단순히 장애를 개성이라고 '믿는 것'과는 구별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근거가 객관적인 사실에 토대를 하던, 주관적 판단에 의하던 상관없이 '수동적이고 강제적'인 태도를 동반합니다. '지구는 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그저 '수동적이고 강제적'으로 믿을 수 밖에 없듯이요. 이러한 수동적인 태도를 동반하는 믿음은 삶의 질적 가치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장애는 개성이다'는 믿음은 결국 장애가 차별적인 사회 구조적 제도의 부산물임을 거부하고, '결정장애도 개성이다'라는 논리모순적 결론에 도달하여 그 어떤 실천적 행위를 이끌어 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장애를 수용한다는 것'은 오로지 본인의 적극적인 삶의 의지에 따라 '장애'라는 맥락과 정의를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장애에 대한 혐오나 피해의식에서 벗어나, 사회적  억압과 차별, 상처에 억눌리지 않는 채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살아가겠다는 선언입니다. 자신의 장애가 다른 장애인보다 더 가벼워서 감사하다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장애가 자기 주체성의 한 요소임을 받아들이고 나의 존엄성은 내가 챙기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과의 비교를 통해서 의미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자기 위안을 삼는'정신 승리'와는 결이 다릅니다.  

 

때문에, 교단에 서기를 원하는 장애인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장애를 능동적으로 수용하는 과정을 거쳤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학생을 가르치겠다는 몰지각한 장애인이라면,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보수적인 교단에  서기까지 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하는 험난한 과정을 감히 견뎌내지 못할 겁니다. 오로지 자신의 주체성이 살아 약동하기에, 학생과 교단에서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그 모든 것을 감내했을 것입니다. 

 

교사는 자기 삶의 깨달음을 통해 숨겨진 타인의 선함을 스스로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때문에, 교사로 설 수 있는 사람은 어려운 임용 시험을 통과할 수 있는 지적 능력만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구도자적인 존재이어야 합니다. 결국, 장애인이 교사로 서기를 원한다는 것은 장애인이 자신의 장애를 수용함으로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을 통해 비장애인 학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선함을 발견하도록 도와주기를 원한다는 것과 동의어입니다. 

 

저는 이제 서두에 꺼냈던 질문에 대해 답을 해보고자 합니다. 심한 뇌병변 장애인을 '장애'라는 이유만으로 '무능력'이라는 불합리한 상상에만 근거하여 교사 임용시험에 탈락시켜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오히려 그 장애인 교사를 통해 학생 스스로 인간의 선함을 배우게 될 거라구요. 때문에, 장애인 교사의 훌륭한 삶의 성찰 능력과 장애를 가진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교육에 대한 열망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더더욱 시설적, 제도적 지원을 해주어야 합니다. 결국, 이런 지원은 '장애 교원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 더 나은 교육적 성취를 위해 '장애 교원에 대한 투자'인 셈입니다. 즉, 장애인을 단지 사회적 배려의 대상이므로 교사가 되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장애인이 존엄한 존재로서 그의 삶을 통해 학생들을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을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학생의 성적일까요? 인간됨일까요? 능력주의로 표방되는 장애인 차별을 통해서는 결코 교육의 본질적 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불공정한 능력주의를 강요하고 재생산하는 삭막한 사회를 양산하고 있는지 반성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불합리한 구분을 일삼는 행위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격언을 짚어본다면, 차별적이고 인간에 대한 존엄성이 사라지는 교육의 위기가 고조되는 지금일수록 더더욱 '장애인 교사 채용'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장애를 가진 이가 대체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당신의 의구심에 앞서서, 장애인이 장애로부터 깨우친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에 대한 당신의 사려깊은 성찰을 촉구해봅니다. 장애인 교사로부터 학생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배우게 될지 봄날 씨를 뿌리는 농부의 심정으로 즐거운 상상을 해보기를 권합니다. 당신의 성찰로부터 시작되어 상상하는 교육의 모습은, 장애인 교사에 의해 학생들에게 심겨진 인간 존엄성의 씨앗이 성장하여 좀 더 구체화되고,더 강해져서 사회에 중요한 가치의 열매를 맺으리라 믿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 서두에서 제가 들었던 질문을 여러분께 되물어 봅니다. 

당신이 만약 임용권자라면,   

음을 듣고 가르쳐야 하는 음악교사로 청각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베토벤입니다.

칠판에 복잡한 과학 공식을 판서를 해야 하는 과학교사로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근위축증 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스티븐 호킹입니다.

팔을 사용하여 붓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미술 교사로, 팔이 없는 지체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석창우입니다.

내담자와 대화를 나눠야 하는 상담교사로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중증 중복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헬렌 켈러입니다.

글을 읽고 가르쳐야 하는 국어 교사로, 저시력 시각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세종대왕입니다.

몸을 움직여야 하는 체육교사로 팔, 다리 없는 지체장애인을 채용하시겠습니까? 그는 닉 부이치치입니다.

이들이 임용시험을 본다면 탈락시켜야 할까요? 당신의 답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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