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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교사를 둘러싼 교사 문화와 지원에 대해

굴레를 벗어나 2023. 7. 29. 20:52

인간을 다양한 기준으로 분류하고 등급을 매기고 위계서열로 배치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만큼이나 오래된 일일 것이다. 그러한 기준의 당위성과 적절성은 그곳의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기 마련이고 따라서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라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어느 사회에서나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는 하나의 틀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장애’ 라는 것이다.

 

보통 장애인은 장애로 인한 열등감으로 인해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의존적이며 늘 누군가의 도움이나 또는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물론 피상적인 입장에서는 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지원’ 이라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말 장애인 스스로가 자신을 장애인이라고 느끼게 하는 것은 ‘차가운 차별’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지원’ 때문이라는 역설적인 상황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 그런 상황이 사회로 첫 걸음을 내 딛는 나에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청각장애아동을 위한 특수학교에서 청각장애를 가진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이니만큼 장애인에 대한 호의적인 그곳에서 청각장애인교사로서 일하면 아주 편하지 않겠냐는 일반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해주는 이 기묘한 이 단어들의 연결이 주는 매력만큼이나 현실에서도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으련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에서 아이러니컬 하다.

 

이 곳의 학교에 근무하는 약 60여명의 교직원 중 청각장애인교사(이하 농교사)가 5명뿐이라 모든 교무회의에 있어서 커뮤니티 수단은 구화이며 따라서 농교사는 수화통역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속적인 의견교환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의 수화 통역은 매우 느리며 또한 회의의 흐름에 느려지다보니 농교사들이 회의에 안건을 발의할 기회를 자주 놓치게 된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교직원들이 미약하게나마 수화를 할 수 있으면서도 5명의 농교사를 위해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상황. 또한 수화를 사용하지 않는 농교사, 즉 수화통역보다는 대필지원이 필요한 농교사에게는 그 어떠한 지원도 없는 상황. 이것은 무슨 뜻일까. 분명, 나는 ‘장애’를 가지고 있고  ‘지원’을 받고 있는데, 어딘가 나의 장애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장애인을 위한 지원으로부터 장애인 스스로가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면, 그 지원으로 인해 자신의 장애를 더욱 크게 느껴진다면 그 지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근로현장에서 부딪히는 청각장애인들의 일반적인 문제는 일차적으로 의사소통에 있다는 점을 쉬이 짐작할 수 있지만 그런 장애의 차이와 장애인의 개별적인 차이에 대한 지원의 이해는 청각장애 특수학교에 근무하는 특수교사들조차 전무한 편이다. 동일한 문제를 가진 같은 장애인이라 해도 그 안에는 각기 다른 경험과 생각과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개별적인 인간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장애인을 위한 지원체계는 보편성 속에 개별성이 고려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나는 장애라는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의사소통의 폐쇄성에서 오는 교사간의 단절은 결국 농교사들의 자발성을 억압하고 누구도 자기 책임의 일이란 의식을 갖지 않게 한다. 의사 결정에 참여할 권한이 없으니 책임질 일도 없다는 것이다. 단지 지시와 전달만으로 움직이는 체계는 학교의 많은 교육 활동을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농교사들이 자신의 일을 건성으로 하게 만든다. 장애인교사가 그야 말로 ‘장애’ 교사가 되는 순간인 것이다.

 

‘장애’ 라는 것은 신체적인 손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손상에 대한 사회와 환경의 잘못된 지원과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렇다면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다름’ 또한 개별적인 인간들에 대한 개별적인 지원으로부터 그 정의를 얻어야 하지 않을까. 장애인 개개의 정체성과 욕구의 추구에 대한 배려를 병존할 수 있을 때야만 우리는 진정한 의미로서 ‘차이’와 ‘다름’에 대한 정의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지원’에 대한 인식을 전환시키는 이런 과정이 선결될 때, 우리는 늘 도움과 보호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장애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킬 수가 있으며, 잘못된 지원으로 인해 되려 그들의 장애를 가중시키는 오류를 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교육이란 교사, 학생, 학교의 세 가지 축이 자연스레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라고 비유해 본다면, 교사라는 집단의 바퀴 안에서도 또 하나의 다양한 바퀴톱니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학벌일 수도 있고, 능력 등 다양한 기준만큼 그것의 톱니가 있겠지만, 유독 장애인 교사에 대한 톱니는 이상하게도 어딘가 맞지 않는, 제거해야 할 그런 것으로 여겨지는 한, 이 세상의 특수교육이란 이루어지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 되지 않을까? 더불어 함께 간다는 것, 그것은 교사 내면의 시발점이 되어야 한다. ‘하나를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하나’를 외부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