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50

미운 오리 새끼

도서관에서 수업 자료를 찾던 중에 안데르센 동화책 '미운 오리 새끼'에 잠시 시선이 끌렸습니다. 매일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는 중증의 지체부자유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해야 하는 저로선 일단, 학생과의 의사소통이 제일 큰 부담으로 다가 옵니다. 그런 아이들과 아침을 시작할 때 책을 쉽사리 접할 수 없는 아이들에게, 제가 대신 읽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매일 책을 고르고 있었지요. 못난 오리가 이쁜 거위가 되어 푸른 창공을 아름답게 비상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이 책을 아이들이 참 좋아하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들고 교실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이 책의 내용에 대해 의구심이 좀 듭니다. 5년 동안 쌓아왔던 청각장애학교에서의 저의 퀄리티를 다 버리고 새로운 곳에서 아무 ..

- Philosophy 2023.07.29

어린 왕자. 길들인다는 것

오늘 날씨가 긴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듯합니다. 몸에 열이 많은 저로서는 매년 여름마다 비는 소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더웠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만 매번 그 기대는 깨지더군요. 이제 한반도도 아열대기후에 들어간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그냥 흘려 버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학생들과 ‘어린 왕자’의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난해(?)할 수 있겠네요. 교직 경력이 6년차인데도 아직도 아이들과 눈높이를 잘 맞추지 못해서 조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 책을 고른 것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하자면 ‘소통의 부재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차이에 대해 한 번 짚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어긋난 소통의 결과는 촛불집회로 나타난 현 시국이 잘 대..

- Philosophy 2023.07.29

농사회의 기득권자들

우연한 기회로 수화를 사이에 둔 농아인과 건청인의 페러다임의 충돌에 대한 주제를 가진 세미나에 참석하게 되었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발표자들 사이에서도 건청인과 농아인이 어느 한 쪽으로 몰리지 않도록 적절히 배분되게 조처를 취한 모양이었다. 그 가운데 농인은 2명이었는데, 한 명은 젊은 측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이는 40대 후반즈음의 농인이었다. 처음에 건청인의 발표자가 내세운 내용이 나의 관점과는 상당히 달라서, 듣는 내내 나의 사유의 공간에서는 끊임없는 불폅화음과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더 나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던 것은 생뚱하게도 농인 어른이었다. 농인 어른 답게 나이 어린 방청객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경험담을 이야기 하는 의도는 참 좋은 시도였는데, 그 ..

- Philosophy 2023.07.29

농문화, 농사회 그 새로운 지평을 위하여

처음으로 농인을 접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할 것이다. 음성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벗어나 손으로 나누어지는 대화들은 비단 수화노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어떠한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농인들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 사람은 건청인 사회에서의 자신과 농아인들 사이에서의 자신을 비교하게 될 것이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자신을 어떤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삶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가? 농아와 청각장애라는 두 용어의 보이지 않는 큰 차이점이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던지는가? 비단 건청인들만이 아닌, 난청인을 포함하여 건청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농인 자신 스스로도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이런 문제를 겪을 수밖에 없다. 그 이전부터 농아인..

- Philosophy 2023.07.29

농사회는 열린 사회인가?

열림과 닫힘 -농사회는 열린 사회인가?- 열림과 닫힘은 우리 시대의 화두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열린 사회, 열린 정치처럼 ‘열린’이라는 형용사로 수식하며 지향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며, 이에 못지않게 열림의 추구가 열림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닫힘의 가식과 기만일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세계 각 정부는 ‘기회의 균등, 열린 사회’을 부르짖고 있지만, 부의 편중에 따라 박탈되는 ‘제한적 기회의 균등, 닫힌 사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나요? 어느 사회에서나 열림에 대한 의지와 열망은 강하며 그 열림은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열림이 바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러한 ‘열림에의 의지’가 제대로..

- Philosophy 2023.07.29

농대연을 위한 변명

농대연 10주년 소고 농대연을 위한 변명 D 선배. 얼마 전 길에서 우연히 아는 후배를 만났습니다. 함께 농대연을 활동했던 풋내기 나는 모습을 본 것이 1999년이었으니 근 10년만의 만남인 셈이지요. 근황을 묻는 나에게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얼버무리는 듯한 손짓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괜한 질문을 했다 싶어 화제를 돌리려 과거의 추억을 꺼내는 과정에서 ‘농대연 10주년 기념’ 이야기도 함께 나왔었죠. 그 때 그 자리에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선배, 이제 농대연은 없어져도 상관없지 않나요?’ 왜 필요가 없는지에 대한 기본 명제는 접어두고서라도 우선 그 후배의 질문이 저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습니다. 우리 청각장애 대학생을 위한 어떠한 교육적인 지원과 사회적 인식..

- Philosophy 2023.07.29

‘함께하는장애인교원노동조합’ 중앙집행위원으로 지낸다는 것

이른 아침 눈을 비비며 뒤적대는 막내딸을 달래서 옷 입히고, 아침 식사도 거른 채 학교에 데려다 준 후, 막히는 출근길을 뚫어가며 겨우 지각을 면했다. 다행스런 한숨에는 식은땀이 묻어졌다. 컴퓨터를 켜자마자 교육부와 타 교원노조의 홈페이지를 들려 교육계 소식 및 동향을 파악해본다. 소수노조의 특성상 정보의 수합이 느릴 수밖에 없고 그 흐름을 놓치면 그만큼 피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번 단체교섭 과정에서 타 교원 소수노조는 정보를 놓쳐 교섭 자체를 참여하지 못했던 것을 뒤돌아보면 얼마 전 단체협약을 무사히 마친 우리 장교조는 정말 천운이 뒤따랐던 셈이다. 뉴스를 검색하고 있더니 카톡으로 정책실장이 연거푸 7월 20일(목) 장애인교원인사매뉴얼 관련 교육부 관계자와 회의 참석, 7월 21일(금), ..

- Philosophy 2023.07.11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말이 정말 뼈저리게 실감하는 3여년의 세월이었다. 교섭기간 내내 이어진 교육부의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완고한 발언들은(장애인 교원에 대한 배려는 비장애인 교원에 대한 역차별 운운 등)은 내가 살아 오면서 겪어본 장애 차별의 개인적 차원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섬세한 촉수의 마디는 그런 부조리를 견디기가 무척 힘들었다. 비틀어지고, 버석거리고, 사그라지기를 수십 번 반복하니 어느 새 나는 가족에게도 고함을 지르는 낯선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학교 동료 교사에게도 고성을 지르며 삿대질을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일은 끝났다. 무엇으로 이룬 것인지 아득하여 알 수 없는 의미들을 겨우 명멸하는 희미한 빛줄기 ..

- Philosophy 2023.05.18

‘감각 번역’에 관하여

고인이 된 김현철 통역사와 관련된 일화인데, 어느 농인이 친한 고 김현철 통역사에게 던진 ‘구름 밟는 소리는 어떠냐?’ 라는 그 질문을 계기로 현철형이 수어통역사로서 통역에 대한 사유와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는 농사회에서 꽤 유명한 얘기이다. 그 질문은 고인에 대한 추모식의 ‘주제’가 되었다. 평생을 농인의 친구로 살기를 원했던 고인의 바램과, 그가 소리로 부터 단절된 농사회의 귀가 되어 주기를 바랬던 우리 농인들의 바램과 고마움이 절묘하게 표현된 문구였다.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할 때의 대원칙은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앞으로 뒤로 읽어도 똑같은 우영우’ 라는 언어 유희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을 한 넷플릭스의 자막을 읽어보면 각 언어의 사회 맥락를 고려해서 절묘하게 표..

- Philosophy 2023.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