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날씨가 긴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듯합니다. 몸에 열이 많은 저로서는 매년 여름마다 비는 소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만큼’만 더웠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만 매번 그 기대는 깨지더군요. 이제 한반도도 아열대기후에 들어간다는 과학자들의 경고를 그냥 흘려 버릴 게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학생들과 ‘어린 왕자’의 동화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는 조금 난해(?)할 수 있겠네요. 교직 경력이 6년차인데도 아직도 아이들과 눈높이를 잘 맞추지 못해서 조금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굳이 이 책을 고른 것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하자면 ‘소통의 부재와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의 차이에 대해 한 번 짚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족입니다만 어긋난 소통의 결과는 촛불집회로 나타난 현 시국이 잘 대변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 동화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뭐니 해도 어린 왕자와 여우의 대화지요. 다 아시다시피 어린 왕자와 여우는 ‘길들이기’의 본질에 대해 설명과 질문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여우는 자기를 길들여 달라고 부탁을 하죠. 하지만 그 길들이기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읽어보신 분은 다 알겠지만, 이 여우가 참 까다롭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만나야 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하고, 처음부터 스킨쉽을 허락하지 않지요. 자신을 길들여 달라고 하면서 이래 저래 주문사항(?)이 많은 이 여우를 누가 기를까나요.
하지만 순진한 건지, 우직한 건지 어린 왕자는 그런 여우의 까탈스런 요구를 다 받아들이며 길들이기를 합니다. 결국 책의 결말에는 ‘그리하여 어린 왕자는 여우를 길들였다’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준 다음 아이들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이 동화의 주제가 무엇인 것 같니?’ 라고 물었더니 똑똑한 학생 한 명이 ‘길들이려면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라고 하더군요.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 학생과 거의 비슷한 내용의 느낌을 가졌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린 왕자가 드넓은 우주를 돌아다니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겨우 ‘여우를 길들이는 방법’ 뿐이었을까요?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명작’이라는 타이틀이 조금 무색해지지 않을까나요. 많은 사람들이 흔히 놓치는 사실은, 왕자에게 길들여 주기를 부탁했던 여우가 왕자에게 길들이기를 가르치면서 길들였다는 점이지요.
왕자는 여우에게 질문을 합니다. ‘길들이기가 뭐지?’ 라면서요. 보통 우리들의 기존 관념이 내리는 정의에서의 ‘길들이기’란 ‘상대를 나 자신의 기준에 맞추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여우의 답변은 우리의 생각과는 조금 다릅니다. ‘상대가 기뻐하도록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한 번 살펴볼까요?
만남을 앞두고 정해진 시간이 다가올수록 기뻐할 상대를 위해 꼭 약속 시간을 지켜줄 것을 요구합니다. 즉 ‘나 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해줄 것을 요구 하지요. 또 살펴볼까요? ‘만남’ 또한 자기 마음대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다가올 수 있도록 기다려 줄 것을 요구하지 않나요? 즉 이 책에서 정의하는 ‘길들이기’란 상대를 배려하며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왕자의 기준에 맞추어 여우를 뜯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며 여우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진정한 ‘길들이기’ 과정인 것 같습니다.
처음에 저는 많은 학생들을 길들이면서 저의 기준에 맞추도록 학생들에게 강요를 했었지요. 학생들이 저처럼 공부 잘하기를 원했고, 저처럼 당당하기를 원했고, 저처럼 자신의 장애를 이유로 뒤로 물러서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저 스스로는 아이를 위해 자신을 길들이는 과정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 학생들과 저와의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만 얻었을 뿐이었죠. 저 또한 모난 성격만 두드러졌을뿐이구요.
아마도 장애아를 키우는 우리 부모님도 저와 비슷한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우리 아이, 즉 상대의 변화만을 요구했을 뿐, 자신의 변화에는 무척이나 무관심했던 나날들 말이죠. 제가 근무하고 있는 학교의 학부모님 중에는 절로 존경심이 우러러 나오는 분도 있는가 하면, 사소한 하나하나 짚어가며 교사와 자원봉사자들을 탓하며 욕하거나 따지는 분 때문에 피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길들어 보면 어떨까요. 청각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을 길들인다면, 듣고 말하는 자체의 소중함을 깨우쳐서 상대방에게 부드럽고 온화하게 말하고 끝까지 경청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지체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을 길들인다면, 좀 더 상대를 배려하는 몸짓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시각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통해 자신을 길들인다면, 밤하늘의 깊은 품속에 숨어 있는 별들의 노래를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길들인다는 것. 그것은 서로를 길들인다는 것이라고 감히 이야기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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