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농사회는 열린 사회인가?

굴레를 벗어나 2023. 7. 29. 20:50

열림과 닫힘

-농사회는 열린 사회인가?-

 

 열림과 닫힘은 우리 시대의 화두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열린 사회, 열린 정치처럼 ‘열린’이라는 형용사로 수식하며 지향하는 것들이 많기 때문만은 아니며, 이에 못지않게 열림의 추구가 열림을 보장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닫힘의 가식과 기만일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례로 세계 각 정부는 ‘기회의 균등, 열린 사회’을 부르짖고 있지만, 부의 편중에 따라 박탈되는 ‘제한적 기회의 균등, 닫힌 사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지 않나요?

 

 어느 사회에서나 열림에 대한 의지와 열망은 강하며 그 열림은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열림이 바로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는 현상은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지요. 그러한 ‘열림에의 의지’가 제대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작업이 필요할까요?

 

 열린 사회가 우리의 시야를 확장해주고 우리의 의식의 지평을 넓혀주려면, 곧 의식의 자유를 속박당하지 않으려면, ‘닫힌 사회에 대한 본질적 배척과 영원한 망각’을 경계해야겠지요.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열린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제한된 현실에서 속박당한 의지를 망각하며 ‘닫힌 사회’에 안주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닫힌 사회가 평안하다면 그것을 스스로 박차고 나오기는 힘든 법입니다. 억압없는 열린 사회로 나가기보다는 평안한 닫힌 사회의 익숙함에 우리는 벌써 물들어 있지 않나요? 일례로 차별적 상황에서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는 ‘귀찮으니까’, ‘원래 그래왔으니까’ 하며 그 상황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반증하지 않습니까? 어느 누구 하나 차별적 상황을 타개해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거지요. 또한 ‘닫힘’에 이의를 제기할 때는 상당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로 합니다. ‘모난 돌이 정에 맞는다’라는 속담을 굳이 들지 않아도 말이죠.

 

 그런데 그러한 ‘닫힌 사회’에 익숙해질수록 감정의 공유는 있을 수 있겠지만 타자를 진정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법입니다. 거칠게 부연하자면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부르짖으면서 정작 사람을 만날 때는 돈, 명예, 인종 등 논리로 재단하며 가리지 않나요? 추운 겨울철 차가운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에 자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면서, 정작 그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여 하지는 않지요.

 

 따라서, 다름을 극복하고 이질적 타자 사이의 이해가 바로 열림의 본질이 됩니다.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한 열림의 행위(희생, 이해, 사랑)가 있어야만이 ‘열린 사회’로 한 발자국 전진 할 수 있는 거겠지요. 그러한 발걸음에는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마틴 루터 킹, 간디 등 수많은 위인들이 현재에도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열림의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죠. 이것은 열림과 닫힘은 서로 대구되는 용어의 관계인만큼 ‘형평적 상반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열림의 행위(특히 희생)가 닫음의 행위와 동등한 가치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닫힘은 열림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습니다. 닫는다는 행위 자체가 열림을 원천적으로 배제해도 자기모순은 없습니다. 그러나 열림은 닫힘을 원천적으로 배제하거나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열림의 행위는 닫힘의 행위에게도 열려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문이 닫혀 있으면 그것을 열 수 있지만, 열려져 있는 문을 열 수는 없겠지요? 자가당착적 모순이죠? 그래서인지 열림의 행위는 닫힘이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사회를 깨쳐 나가기 위해 영웅적 역량을 필요로 하거나 뛰어난 연대감과 희생정신이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죠.

 

 여기까지 제가 하고 던지고 싶은 질문을 하기 위한 기반 작업으로서 긴 이야기를 끌고 왔네요. 이제 참아왔던 그 질문을 여러분께 던져 보고자 합니다.  농사회는 열린 사회인가요?

서두에서 밝혔지만 다시 언급하자면 ‘현실의 안주는 곧 닫힌 사회, 희생과 이해의 행위가 수반한 사회는 열린 사회’라고 했습니다.

 

 농사회는 과연 어떠한가요? 현재까지 농사회의 소속구성원들은 자신이 소수적 타자임을 부각시켜 주류사회(건청사회)로부터의 ‘받아들임’을 줄곧 요구해왔습니다. 사회적 차별 철폐 및 장애인권보장을 외치면서요. 그런 도시적 관계에서는 주류 사회가 곧 ‘닫힌 사회’이고 농사회의 구성원들은 ‘열린 사회’를 추구하는 능동체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를 뒤집어 보면 어떨까요? 농사회 내부에서는 수화실력 또는 인공와우수술의 유무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당하거나 배척당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겠지만, 아직도 농아인들 가운데 자신의 정체성 혼돈의 원인을 농사회와 건청사회의 배척에서 찾는 수많은 논문이 이를 증거합니다. 닫힌 사회의 문을 격파하고 열린 사회를 추구하고자 했던 동지들이 사실 열린 사회의 적들이었다는 역설은 참 아이러니하죠.

 

 또한 이유야 다르겠지만 수화에 대한 관심이 설사 장기자랑에 보여줄만한 특기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건청인에 대한 심한 적대감 또한 ‘닫힌 사회’의 전형이라고 본다면 너무 거친가요? 이것이 바로 ‘감정적 공유’는 가능해도 ‘이해’는 어렵다는 닫힌 사회의 전형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정체성과 특성을 유지하면서 타자를 향해 열 줄 아는 개방성을 가진 개체들이 ‘우리’를 이루었을 때, 열린 사회가 그 결과로 오지 않을까요? 농사회에서는 나(농인)가 너(구화인, 청인)를 거쳐서 ‘우리’를 인식하고자 할 때, ‘나-우리’의 이항대립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나(농인)’와 ‘우리’의 연결고리는 ‘너(구화인, 청인 즉 타인)’인 겁니다.  열린 사회의 추구는 먼저 자신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다른 타자와의 인간 관계를 폭넓게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자신이 열린 사회로 나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긴 글을 마무리 지어야 겠습니다. 더 이상의 질시나 반목이 열린 사회로 나아가는 우리들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더 이상의 대립이나 갈등, 회피가 닫힌 사회에 편안히 안주하려는 우리들의 나태한 모습이 아니었으면 합니다. 좀 더 타자를 배려하고, 좀 더 나를 열어 놓고, 좀 더 서로를 동일화하는 작업을 모두가 함께 하여 열린 사회인 농사회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