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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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감각 번역’에 관하여

굴레를 벗어나 2023. 2. 4. 01:53

고인이 된 김현철 통역사와 관련된 일화인데, 어느 농인이 친한 고 김현철 통역사에게 던진 ‘구름 밟는 소리는 어떠냐?’ 라는 그 질문을 계기로 현철형이 수어통역사로서 통역에 대한 사유와 자세를 가다듬게 되었다는 농사회에서 꽤 유명한 얘기이다. 그 질문은 고인에 대한 추모식의 ‘주제’가 되었다. 평생을 농인의 친구로 살기를 원했던 고인의 바램과, 그가 소리로 부터 단절된 농사회의 귀가 되어 주기를 바랬던 우리 농인들의 바램과 고마움이 절묘하게 표현된 문구였다.

언어를 다른 언어로 통역할 때의 대원칙은 최근에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앞으로 뒤로 읽어도 똑같은 우영우’ 라는 언어 유희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번역을 한 넷플릭스의 자막을 읽어보면 각 언어의 사회 맥락를 고려해서 절묘하게 표현하는 통역의 메커니즘속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구름밟는 소리’는  ’통역‘이라기보다는 ’감각 번역‘에 가깝고, ‘감각 번역’은 ‘언어 통역’보다 상당히 어렵다. ‘언어 통역’ 과정과는 달리 ‘감각 번역’은 그러한 동일한 과정을 거칠 수가 없다. 하나의 감각을 다른 감각으로 치환한다는 것은 공통된 맥락에서 출발할 수가 없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장교조 김헌용 위원장이 유럽 여행 중 ‘빈 센트 반고흐 미술관’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가이드 프로그램을 통해 미술 작품을 경험한 일화가 그의 페이스북에 소개되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시각장애가 있는 그에게 그 가이드가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 외모’라는 시각적 정보를 세세하게 설명한 부분이었다. 되짚어보니, 나는 여태껏 꽤 많은 시각장애 동료교사와 유대관계를 맺으면서 단 한 번도 나의 외모를 설명해 본적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 날 저녁에 집에서 내가 사진으로 보고 있는 연애인의 외모를 설명하고 딸에게 얘기를 듣고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 후에 그것을 서로 비교 했더니, 서로가 생각한 이미지는 너무나 달랐고 이에 딸은 설명이 부족했다며 나를 힐난했다. ‘감각’은 나에게서 타인에게 옮겨가는 순간 불완전한 형태로 전달될 수 밖에 없음을 다시금 느꼈다. 나는 고민이 생겼다. ‘감각 번역’으로 온전히 전달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4년 전 가을날 나는 김헌용 위원장과 함께 장애인교원 고충 실태를 얘기하러 청와대 방문 길에 경복궁 서쪽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엄청난 수령의 은행나무가 길가에 드리우는 노란 빛깔의 포근한 정경 느낌이 너무 좋아서, 나의 팔꿈치를 잡고 옆에서 걷던 김헌용 위원장에게 풍경을 설명하려 시도를 했었다.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실패했었다.  ‘노란 은행 잎’은 ‘따뜻한 느낌의 잎’으로, ‘청명한 가을하늘’은 ’바다의 상쾌함‘으로 시각을 촉각 및 온각으로 대체하거나 청각으로 대체하는게 고작이었다. 사회적 통념에서는 ’노란 색‘이 ’따뜻하다‘ 라는 감정와 연결이 되지만, 솔직히 나로서는 ‘노란 색’이 ‘유약하다’와 좀 더 강하게 연결이 된다.

즉, 각자 살아온 감각의 경험의 질과 해석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는데, 오로지 사회적 통념에만 근거해서 ‘감각 번역’을 한다는 것은 타당한 걸까? ‘노란 색’은 ‘따뜻하다’라고 설명을 듣은 그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바다의 상쾌함으로 가득찬 하늘’을 상상해보라고 6살 막내 딸에게 얘기했더니, 이해는 되는데 얼핏 그려지지가 않는다며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선한 의도(?)와는 달리 풍경을 전달하는 나의 언어 능력은 애초부터 처참했으며, 시각장애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 감각의 부재를 온전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어떤 대체 표현으로 그 간격을 매워야 하는지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할 수 없이 헌용샘에게 가까운 사람이나 여자 친구는 이런 것을 어떻게 설명해주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걸작이었다. ‘잘~’  

생각해보니, ‘오르가즘’을 거의 모를거라 기대되는(?) 청소년에게 그 감각을 대체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마라토너는 피치 하이에 도달하면 최고의 쾌감이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 감각은 또 어떻게 설명해야 온전히 전해질 것이며 평생에 마라톤은 커녕 5Km도 뛰어 본 적 없는 우리는 그 쾌감이 고스란히 느껴질까? 클래식 음악을 듣고 깊은 황홀경과 샘솟는 고양감을 청각장애인에게 또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담배 한 개피 피는 깊은 한 숨의 시원함을 비흡연자들은 설명만 듣고도 이해할 수 있을까?  

암튼, ‘감각 번역’으로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라고는 ‘내가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다’ 라는 진심 밖에 없을 것 같다. 어쩌면 그게 ‘감각 번역’의 핵심일지도 모르겠다. 다음부터 만나는 시각장애인에게 ‘나의 외모’를 설명하는 인사를 꼭 잊지 말고 해야 겠다. 시각장애인은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미지를 그린다고들 하던데, 나의 뛰어난 외모는 고작 목소리 하나로 온전히 담을 수야 없지. 암.

‘나는 세상 만사가 귀찮음으로 가득찬 눈이 그 무게를 못이겨 끝부분이 밑으로 쳐져 있어요. 말하는 것을 싫어하고 낯가림이 심한 입술은 얇은 마디로 앙 다물고 있어요. 그런데 쓸데 없는 고집은 또 세서 세상의 조언을 모조리 무시하겠다며 콧날은 뭉툭하게 튀어나와 있구요. 잔소리는 더더욱 듣기 싫다며 귓날도 엄청 작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으로 가득찬 탱글탱글 둥근 안경테 덕분에 세상은 나를 외골수로 치부하지는 않더라구요. 상대를 대면대면 대하는 낯가림 때문인지 피부는 메마른 사막의 버석거리는 모래처럼 거칠구요.  최근에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다들 깎으라고 성화인 것을 보면 도둑놈처럼 생겼나봐요.‘

이만하면 훌륭한 ’감각 번역‘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