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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수어문학은 마임이 아니다

굴레를 벗어나 2021. 7. 17. 15:59

2 수어 민들레에서 주관한 수어문학공연에 다녀왔습니다. 저의 짧은 지식에서는 한국에서 수어 문학에 대해 다루기 시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관심과 기대를 안고 지켜보았지요. 그러나,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저의 기대가 너무 컸었나봅니다.

저는 대학시절 국어교육을 부전공으로 했었습니다. 덕분에 문예사조론과 한국문학통사론‘, ‘문예창작수업을 들으면서 문어예술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맛본 경험이 있었습니다. 비록 겉핧기 식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때 고민하고 얻었던 예술에 대한 저의 결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번 수어 문학에 대해 토론하거나 비평할 부분이 너무 많았습니다.

일단, “예술이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진다면 너무 광범위하니, 바꿔 물어 봅니다. “예술의 반대말이 뭘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추함, 더러움을 이야기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답변들은 예술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 것이라고 봅니다. 예술은 오히려 추함을 비틀어 미의 기준을 재정립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예술을 다루는 학문인 미학을 뜻하는 단어 aesthetics에 부정의 접두사 an을 붙이면 마비, 마취라는 뜻의 anaestheia가 됩니다. 즉 예술의 반대말은 추함이 아니라 무감각인 것이죠. 뛰어난 예술작품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감각을 되살리고, 예민해진 감각을 통해 세상을 폭넓게 이해하거나, 깊이있는 해석을 할 수 있게끔 도와줍니다.

그래서, 거칠게나마 예술에 대한 정의를 축약해보자면 예술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익숙한 현실 때문에 죽어버린 감각을 새로운 시각으로 경험하게 하여 권태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것들의 총체라고 감히 이야기 해 봅니다. 문예사조의 흐름에 따라 예술의 본질을 현대에 들어와서 가장 극렬하게 드러낸 작품을 하나 꼽으라면 뒤샹의 샘물을 저는 첫 손에 꼽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예술을 이야기할 때 자연스럽게 2가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첫째로 무엇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냐?’, 둘째로 무엇에 의미를 둘 것이냐?’ 이지요. 저는 이 고민들이 예술의 가치를 질적으로 밀어 올리는 근간이라고 봅니다.

여러분들은 여러 가지 뷔페음식을 먹을 때는 그 맛들의 향연에 쉽게 취하지만, 막상 식당 문을 나서면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마찬가지로 예술은 무엇이든지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다고 해서 그것이 곧 예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술은 첫째로 세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하며, 둘째로 기존의 관념에 젖어 타성적으로 의미를 두었던 것들을 해체하는 작업을 시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점은 기성과 타성에 젖지 않고 창의적인 해석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에 예술의 관심과 의미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모든 문학을 비롯하여 수어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명합니다. 농인의 삶과 감정을 근간으로 하여, 기존에 우리가 타성적으로 가치를 두었던 농인의 자부심을 해체하고 재구조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또한, 너무나 익숙해서 몰랐던 시각이라는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과정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수어민들레에서 주관한 수어문학공연의 일부 내용은 조금 미흡한 점이 있었습니다. 수어 문학은 마임과 달라야 합니다. 마임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 언급했듯이 예술은 현실의 재창조와 새로운 가치 부여에서 근본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이버에서 마임(mime)’을 검색해보면 어원은 그리스어의 미모스(mimos)에서 유래하며 '흉내'를 뜻한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 마임은 본질 자체가 모방인 것이지요. 그런 연유로 초장기에는 마임이 저열한 사실적 광대극 취급을 받았었지요.

그래서 단순히 모방에만 머물러 있던 펜터마임에 대한 비판이 현대마임이 태동하게 됩니다. 조잡한 광대극에 가까운 펜터마임과 달리 현대마임은 마르셀 마르소의 요람에서 무덤까지마임극을 통해 극찬을 받으며 예술의 한 영역으로 우뚝 서게 만들지요. 암튼 중요한 것은 마임에서조차 모방에만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재창조라는 예술의 본질에 한 걸음 내딛고자 노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수어문학의 일부 공연 내용은 현실 세계에 대한 모방에만 머물러 있어서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예술을 맨 처음 규정하고자 시도한 사람이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입니다. 플라톤은 실제를 그대로 모방한 것만이 예술이라고 여겼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환상을 품게 하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라고 했지요.

그런 플라톤의 관점에서 보자면 수어문학에서 현실을 맹렬하게 모방했던 일부 작품은 플라톤의 격찬을 받았을 게 분명할 것 같습니다만, 플라톤의 예술에 대한 시각은 곧 후세 예술가에 의해 극복해야할 과제로 전락합니다.

복잡한 현실은 더 이상 모방이론을 통해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예술을 규정한 미학의 개념인 모방 이론은 더 이상 완벽한 예술에 대한 관점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방이론은 예술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기는 하지만 예술의 성질 전체를 아우르는 이론은 될 수 없습니다. 현실에 대한 모방에만 머물러 있는 일부 수어 작품은 뷔페 식당의 맛의 향연처럼 재미있을지는 모르지만, 식당문을 나서는 순간 곧 마주하게 될 공허함을 결코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1~10’, 또는 한글 지화를 이용한 수어 작품은 언어 유희일 뿐입니다. 청인 세계에서도 1~10을 이용한 작품은 수두룩합니다. 일례로 각설이 타령이 그렇고, 춘향전에서 춘향이가 부르는 십장가에서도 1~10 숫자를 차용하여 노래합니다. 다만, 그 작품들은 하나의 주제로 모으면서 형식을 1~10이라는 숫자를 차용하였기 때문에 오늘 날에도 전승되어 내려 옵니다만, 그 자리에서 다룬 수어 문학 작품은 개그만 박명수의 짧은 3행시 같은 기발함뿐이었습니다.

물론 문예사조에서는 다다이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에 이르면 1~10이 수어 언어의 해체를 통한 작품으로 평가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작가 또한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만든 작품으로 여겨지지는 않습니다. 존 케이시는 4 33초 퍼포먼스 작품을 통해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식조차 파괴하면서 그것을 통해 기존의 음악이라는 정의를 재정립해보자는 시도를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까지는 수어 문학 장르에서는 해외에서도 그렇고 수어의 형식 즉, 수어라는 언어의 규율조차 해체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접근이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청인 중심의 세계에서 늘 언어선택에 대한 억압을 받아온 농인들의 감정이라면, 수어든, 구어든 모든 언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언어적 규율과 문법적 억압에 대해 탈피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모종의 예술적 시도라도 있었을 것 같은데, 참 미묘합니다.

아직까지 농인들의 문예사조의 흐름이 거기까지 다다르지 못한 것일까요? 수어에 대한 아방가드르 운동은 커녕 수어에 대한 찬양만이 가득한 수어 작품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청인 예술가들은 음악의 형식조차 파괴하며 음악에 대한 재정의를 되묻고 있는 실정인데 말이죠. 농인 예술가들은 시각의 형식조차 파괴할만한 용기가 없는 걸까요? 아쉽습니다.

수어민들레에서 보여준 일부 수어 문학 작품은 너무 수어에 매몰된 나머지 예술의 본질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타이타닉 수어 문학 작품은 그저 마임일 뿐이었습니다. 관우와 장비의 활극과 포도나무의 슬픈 에피소드와 구르는 돌멩이 수어 문학 작품 또한 수어 표현 기법을 극치로 밀어 올리면서 우리 농인의 시각이라는 감각을 새롭게 일깨웠다는 점에서 긍적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지만, 의미의 재해석이나 낯설게 하기를 통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를 못한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또한, 다른 농인의 자연 풍경을 노래한 수어 문학 작품에서는 기존의 수어 문학 표현 기법을 그대로 흉내내었습니다. 화가 램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은 너무나도 다릅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세상을 재창조한 것 때문에 세간의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연 풍경에 대한 수어 문학 작품에서는 자기만의 독특한 기법(수어 표현)이 있었어야 합니다. 반고흐가 램브란트 기법을 흉내내어 별이 흐르는 밤을 그렸다고 상상해보세요. 과연 그 작품은 오늘 날 그가 누리고 있는 격찬과 동일하게 받았을까요? 분명 램브란트의 아류작이라고 비난당했을 겁니다.

연극 연출가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배우를 훈련하면서 냈던 유명한 과제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밤이라는 말을 40가지로 표현하라는 거지요. ‘오늘 밤 40가지로 표현을 하려면 일단, 밤이라는 개념을 특정한 시간대를 가리키는 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별하는 밤, 뜨거운 밤, 외로운 밤 등등 여러 가지 밤이 나오는 거지요. 이처럼 동일한 소재에서도 표현 기법에 따라, 표현 내용에 따라 천차만별 달라질 수 있고 그것이 낯설게 하기를 통해 우리의 감각을 새롭게 일깨우는 것이 예술의 힘입니다.

그런데, 그 날 수어 문학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자연 풍경은 의례 부드러운 바람, 평화롭게 날아가는 새의 이미지가 천편일률적으로 등장을 합니다. 저는 그래서 못마땅한 것이었지요. 그 수어 문학 작품을 만들기 위한 농인 작가의 고민이 전혀 보이질 않았습니다. ‘자연이니까, 나비와 바람이 등장해야지.. 좀더 부드럽게 표현해야지하고 대충 만든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수어 문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오히려 영상으로 보았던 장미 나무수어 문학 작품과 똑딱 똑딱수어 문학 작품이 잘 제시했다고 봅니다. 그 작품들은 격찬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장미나무를 예쁘게 자르려는 정원사와 그것에 대해 뽀족한 가시로 거부하는 장미 나무의 모습을 통해 수어를 거세하려는 청인 사회의 억압과 거기에 대항하는 농인의 감정을 절묘하게 대입시킨 훌륭한 작품이었습니다.

또한 똑딱똑딱수어 문학 작품은 구어중심의 교육 현장에서 늘상 반복되는 농인의 지루함을 똑딱똑딱이라는 반복되는 운율과, 점층적으로 현실에서 이상세계로 나아가고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는 심상의 전개를 통해 주제를 잘 드러낸 아주 뛰어난 수어 문학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수어 문학을 다룰 때 이 작품을 첫 번째로 꼽을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수어 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수어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사실 상이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수어 문학이 무엇이기에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또는 수어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기에 무엇인가로 연계되는 문제입니다. 과연 우리 농인들은 수어 문학을 통해 무엇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걸까요? 그러기에 수어 문학은 무엇이어야 하는 걸까요. 이에 대한 고민과 답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두려 합니다.

다만, 수어 문학이 나아가야 할 지향점을 제시한다면, 다음과 같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1. 자기만의 독특한 수어 표현 기법이 있어야 한다.(시인들이 왜 자기만의 단어수첩을 들고 다니는지 생각해보라) 2. 기존의 가치 또한 해체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농세계의 가치관도 박살낼 수 있어야 한다. 뒤샹의 샘물 작품처럼) 3. 경직된 사유의 틀을 파괴할 수 있어야 한다.(4개의 손으로 표현하는 수어 문학 작품 등) 4. 보이는 것 너머(숨어 있는 감각-소리 등)를 볼 수 있어야 한다. 5. 농인의 사상과 감정을 진실되이 담아야 한다. 6. 새로운 세계, 새로운 가치관을 발굴해야 한다. 7. 수어 문학에서도 다양한 문예사조(철학)가 나타나야 한다.

이제 첫 발을 내딛은 한국 수어 문학에 너무 가혹한 비평을 하지 않았나 하는 미안함이 없진 않지만, 온실 속의 화초보다 거친 자연 속의 잡초가 더 강인하듯이 이제 막 태동한 한국 수어 문학의 나아가야 할 지향점이 제대로 잡히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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