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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혐오의 언어와 경계

굴레를 벗어나 2021. 7. 17. 15:58

최근 제가 좋아하던 사이트에서 ‘벙어리’라는 어휘가 유머의 껍데기 형식으로 조소 섞인 댓글 속에 넘칠 거리는 것을 목도했습니다. 화석처럼 건조하게 굳었던 마음이 불처럼 넘실 춤출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아득하게 먼 시절부터 입과 입 사이에 전해 내려 온 ‘벙어리’에 대한 직접적인 분노보다 그 어휘의 뒤에서 숨어 잔인한 웃음을 짓고 있는 ‘모욕’과 ‘혐오’라는 녀석 때문입니다

‘혐오’가 무엇이냐는 불분명한 전선의 고착화가 빚어온 작금의 실재가 서글픕니다. 그 논리는 세월호 가족에 대한 그것과, 다문화 가족 그리고 동성애에 대한 그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종교적 이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아니라 ‘혐오’가 ‘혐오’ 아닌 척하며 가식적인 교묘한 말로 사회적 약자를 잔인하게 난도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웃음거리’가 될 때라는 대답이 가장 많을 겁니다. 웃음거리가 된다는 것은 모욕을 당하는 순간 자신에게 모욕을 주는 사람 외에 다른 시선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여러 사람들 앞에서 혐오와 모욕, 웃음거리가 되는 것은 단둘이 있을 때 당한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차별’과 ‘혐오’는 서로 앞뒤를 다투며 장애인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 사회적으로 묵인 내지는 ‘공인’된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그 차별은 곧 모욕이 되어 왔습니다. 만일 그 사람들이 놀림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배제된 상태임을 확인하면서 다시 한 번 참담하게 배제시키는 것이 됩니다. 이미 차별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 차별을 부각시키는 것은 사회적 이중 배제로 심한 모욕이 되는 겁니다

언어를 이용해서 다른 사람을 모욕하는 방법 중에 가장 혐오의 늬앙스를 가진 것이 바로 ‘조롱’입니다. 조롱 받은 상대는 금방 무안해져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됩니다. 배타적 모욕 행위에서 차별적 모욕 행위에 이르기까지 모욕을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괴로운 일이지만 그걸 지켜보는 제 3자와 사람들에게는 ‘웃음’이 나옵니다.

사실 ‘조롱’은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합니다. 그중에 한 가지는 특정 개인의 비사회적 태도에 대한 사회적 ‘징벌’인 셈이지요. 사회는 그 자체의 원활함과 유연성을 가지고자 합니다. 그래서 개인의 툭 불거진 행동은 곧 사회적 경고의 대상이 됩니다. 집단적 규율을 중시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조롱’의 프리즘이 매우 다양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롱은 그 대상에게 창피를 주어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그것을 교정해보려는 은밀한 의도가 들어 있다는 것이지요.

조롱이 궁긍적으로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모른다고 해도, 그런 사회적 웃음이 기능하고자 하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합니다. 더구나, 벙어리의 더듬거리는 발음을 굳이 조롱하여 교정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일까요? 벙어리를 조롱하여 그 어떤 사회적 경고를 하자는 것인지 목적이 불분명합니다. 때문에 ‘벙어리’를 웃음거리로 삼는 행위는 거의가 악의적인 ‘조롱’의 형태를 띄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습니다.

조롱과 모욕은 ‘웃음’의 기능을 역으로 사용합니다. 다른 사람을 웃음거리로 만듦으로써 그를 사회 밖으로 이탈시키는 것입니다. 즉, 사회적 배제의 전략으로 인간관계의 섬뜩하리만치 냉혹한 이면을 보여 줍니다. 조롱과 모욕의 행위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배려 없이 감수성이 메마른 상태에서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약한 모욕이라도 사람 사이에서 자칫 ‘관계의 단절’로 이어집니다.

더 나아가 모욕당한 사람에게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게 하고 일상생활에서 또 다른 모욕으로 되갚으려 하며 그 강도가 더 세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국 모욕이 더 큰 모욕을 불러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조롱을 받은 청각장애인이 그 모욕을 다른 장애영역으로 분을 풀이하게 되거나 자기보다 더한 약자에게 복수를 하게 될 악순환이 반복될 뿐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각기 다른 세계(개념)의 만남이라고 보았습니다. 언어만큼 그 사람의 개념과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해당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삶의 형식으로부터 발생하는 언어 규칙을 따른다는 거지요. 때문에, 이념적 차이는 곧 언어의 차이에서 확인할 수 있고, 상대와의 다툼은 언어의 차이를 짚어보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언어적 논리의 한계를 지적했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겼었지요.

그러나 ‘벙어리’가 혐오냐 아니냐라는 문제는 말할 수 없는 그 언어의 논리에 대한 우리가 침묵을 깨면 우리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 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다’ 라고 언급한 것은 언어의 한계 앞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는 운명론적 관념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언어력을 키울수록 우리의 세계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다시 되돌아와서 ‘벙어리’는 ‘혐오’일까요? 일상용어로 사용되어야 할 필수 언어일까요? 저의 언어 세계에서 그것이 ‘혐오’라고 판단하는 논리를 제시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그 언어를 대체할 새로운 세계 언어가 있는가? 대체할 언어가 있음에도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사용은 혐오 감정의 발로입니다. ‘벙어리’는 사실 예전부터 들리지 않는 자를 일컫는 순우리말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비하의 뜻을 담지 않았으나 시대가 흐르면서 어휘가 지닌 본래의 의미는 퇴색되고 점차 비하와 조롱의 뜻이 더 크게 담기게 됩니다.

더구나 오늘 날에는 ‘청각장애인’, ‘농인’이라는 대체할 수 있는 언어가 있고 특별한 상황이나 이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벙어리’라는 어휘를 사용하는 그 의도에는 결국 불순한 것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알면 보이나니 그 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라는 조선 시대 문인 유한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벙어리가 차별과 조롱, 혐오의 언어임을 몰라서 사용한 것과, 그걸 알고도 사용한 것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때문에, 벙어리 장갑이 혐오의 언어이냐고 묻는다면 그전까지는 아니었어도, 벙어리 장갑이라는 어휘를 대체할 어휘를 쓰자는 공감대가 펴져 나가는 순간부터 ‘벙어리 장갑’은 곧 혐오의 언어가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조롱과 혐오의 의미가 내재해 있는 언어를 지속적으로 대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그 언어를 사용하는 화자와 청자 간에 서로 삶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가? 서로의 삶에 대한 공감과 공유조차 없음에도 그 언어의 사용은 곧 혐오입니다. 미국 스탠딩 코메디를 보면 흑인이 흑인 스스로를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개그를 펼쳐갑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것이 ‘비하’의 언어를 사용했을지언정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비하’와 그 결이 달랐다고 봅니다.

차별적인 사회의 한 단면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언어의 이면에는 화자와 청자의 억압적이고 고단한 삶을 관통해온 동일한 경험과 공감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피부 색깔을 비하하는 용어를 사용했지만, 정작 그 비하의 초점은 ‘사회’를 향한 것입니다. 사회로부터 받은 상처를 곧이곧대로 드러내면서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청각장애인들이 소리의 단절로부터 오는 사회적 외로움을 서로 공유하고 있는 타인과 ‘벙어리’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봅니다. 소통의 부자유함에서 오는 아이러니를 비꼬는 사오정 시리즈 조차도 청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현실의 아픔을 되새기는 동시에 그런 사회를 향하여 가벼운 조소를 던질 조그마한 항의 시위가 되는 셈입니다. 청각장애인과 가깝게 살아가고 그 문화를 향유하는 이와 함께하는 그런 개그나 용어의 사용은 하나의 따뜻한 연대의 차원으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의 삶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내뱉는 ‘벙어리’에는 청각장애인의 삶에 대한 공감이나 존중이 전혀 없습니다. 차별적인 사회에 대한 연대하는 차원에서의 조그마한 분노의 표현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혐오’와 ‘멸시’로 기능합니다. 심연보다 더 깊고 고요보다 더 조용한 침묵의 세계에 살아가는 청각장애인의 삶을 조금이라도 가슴 속으로 느낀다면, ‘벙어리’라는 어휘를 그리 쉽사리 선택할만치 그 무게가 가벼울까요?

셋째, 그 언어의 사용이 좀 더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벙어리’라는 용어가 일상 언어인지, 비하의 언어인지는 세번째 명제에서 확연히 갈라진다고 봅니다. ‘벙어리’라는 용어의 사용을 통해서 우리 삶과 청각장애인의 삶의 간격을 얼마나 좁히거나 서로를 이해하게끔 도움이 되었을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벙어리’는 비하의 뜻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문학작품에서의 ‘벙어리’ 사용은 그 시대적 배경과 그 당시 사용되어 온 언어, 그리고 등장인물을 둘러싼 사회를 드러내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문학작품을 읽음을 통해서 우리는 ‘벙어리’에게 가해진 그 시대와 그 사회의 엄혹한 현실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문학작품에서도 ‘벙어리’를 쓰지 말라는 거냐는 일부 사람들의 항변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겁니다. 더 나아가, 왜곡된 인식을 바탕으로 예술이랍치고 그 용어를 사용하는 것 또한 ‘비하’와 마찬가지입니다.

‘벙어리’가 비하냐, 아니냐의 문제는 위의 세가지 명제를 놓고 스스로 고민해 보셨으면 합니다. 차별을 고발함과 동시에 그것을 해결할 실마리를 잡기 위해서는 타인을 인간적으로 대하는 것을 넘어서 ‘한 사람’으로 대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라는 친밀한 인식과 구체성을 가져야만 타인의 문제를 곧 나의 문제로 인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사회 안에서 작동하는 ‘벙어리’라는 기제에 포함한 장애인, 트렌스젠더, 흑인, 저소득층 노동자, 다문화 가족 등의 껍질을 벗겨버리고 그들의 본 모습을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권의 감수성이며, 여러분의 엄청난 윤리적 기준과 가치관이 됩니다. 윤리란 자기 주체화의 작업이자 동시에 타인의 주체화 작업입니다. 바로 여기에 차별의 문제를 넘어서는 윤리적 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이 또한 구체적인 한 사람에서 출발하고 밥 한 술에서 출발하여 감정의 연대감을 이루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쓰고 있는 ‘벙어리’라는 언어는 청각장애인에 대한 ‘조소’입니까? 아니면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감정의 ‘연대’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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