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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농교사가 바라보는 인공와우 수술

굴레를 벗어나 2021. 7. 17. 15:13

실존은 본질에 앞서서 온다. 혹은 당신이 다른 표현을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주관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 사르트르

 

  •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인공와우에 대한 농인의 반응은 매우 극단적으로 갈렸습니다. 드릴로 두개골 측면에 구멍을 뚫어 수신기를 와우관에 집어 넣는다는 상상만으로도 거부감과 함께 신체상의 큰 변화에 따라 잃어버릴지 모를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농사회에서 인공와우수술에 대한 큰 반발이 있었습니다. 또한, 인공와우에 대해 반대하는 농인들은 본인 동의도 없이 오로지 보호자의 의사에 의해 수술이 결정되는 것에 대해 더욱 집중적으로 격렬하게 비난을 했었습니다.
     
  • 그러나, 예전에는 거의 2~3천만원이나 되는 인공수술에 대한 모든 경제적 부담이 오늘날에는 의료보험의 80%에 가까운 지원으로 인해 본인부담이 조금 덜게 되었고, 더구나 의학적 발전에 따른 의료 시술의 간편성 및 부작용의 위험이 줄어들면서 인공와우수술이 사회전반적으로 확산이 됩니다. 또한 농사회(농인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안에서도 하나 둘씩 인공와우수술을 받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면서 오늘 날 인공와우수술에 대해 반대와 찬성의 치열한 토론의 핵심이 조금씩 흐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저는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조금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현상이 인공와우에 대한 농사회의 치열한 토론 끝에서 나온 합의로 인해서가 아니라, 그저 골치아픈 일은 뒤로 치우자는 식으로 우리들의 관심이나 흥미가 사라진 것으로 보인 것이 첫번째 이유이고 더 나아가 학계나 농사회 및 의학계에서는 인공와우수술에 대한 농인의 정서적 반응을 주목하면서도 단순한 현상으로 치부해버리거나 제언조차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척박한 우리 사회의 토론문화를 각인시키는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단순히 인공와우수술의 반대가 수화나 농사회의 극단적인 보호 내지 왜곡된 자긍심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지정하기에는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제대로 짚어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 ‘인공와우수술’과 관련된 논문을 검색해보면 의례 따라나오는 것이 ‘인식’ 또는 ‘만족도’입니다. 인공와우수술에 대해 농인들의 인식이 부정적으로 나오더라, 농학교의 특수교사들은 인공와우수술에 대해 긍정적이더라, 인공와우수술에 대한 학부모의 태도는 긍정적이더라, 인공와우수술에 대한 만족도가 몇 %로 나오더라.. 등등이 지금도 쏟아지고 있는 구태의연한 논문들의 주제입니다. 그런 논문들이 우리 농사회의 발전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 성찰적인 토대가 되어야 할텐데 단순히 단편적인 현상분석에만 매달릴 뿐이어서 불쏘시개로 쓰기에는 너무 미흡해 보입니다. 이런 논문들로부터는 기계적인 in put과 out put만 있을 뿐이어서 in put을 통해 농사회와 농인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내재적인 과정을 살펴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 여기서는 저는 ‘몸이 곧 나’ 라는 정체성 문제를 인공와우수술에 따른 몸의 변화와 더불어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인공와우수술에 대한 농인들의 깊은 거부감의 원천이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변화’이기 때문이며, 그 변화의 종착점이 육체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과 나와 타자의 함수 관계에서도 지대한 영향의 범위를 가지기 때문입니다.
     
  • 장자의 호접몽이나 카프카의 변신, 또는 번데기에서 탈피하여 나비가 된 곤충의 정체성을 언급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지만, 더 쉽게 풀이하기 위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를 차용해보고자 합니다. 이 동화는 영문학의 고전으로 유명한 만큼 시시한 동화라고 얕볼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일관성이 없는 스토리(이 동화가 주는 결론을 이야기해보세요)의 전환 속에서 등장 인물을 통해 드러내는 해학과 역설을 발견하는 것은 상당한 학식과 방대한 사전 지식 없이는 곤혹스러운 작업이 될 정도로 깊이 있는 통찰력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분도 이 동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를 건져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몸의 변화’라는 것이지요.
     
  • 토끼 굴에 들어간 앨리스가 처음 부딪히는 문제는 ‘몸의 크기 변화’입니다. 약을 먹고 지나치게 커버린 자신의 몸을 두고 앨리스는 혼란스러워 하며 흥미로운 행동을 합니다. 바로 자신이 올곧은 자신으로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본인의 기억을 테스트하죠. 친구의 이름 및 다른 나라의 수도 이름을 상기하려 노력하는 것을 보면서 몸의 변화가 정신의 변화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 즉, 몸의 변화가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현상의 개념 정의조차 뒤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수술 전 우리가 ‘수화’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긍정적이거나 호의적인 인식이 인공와우수술 후 발음 교정을 위해 주변에서 강압적으로 ‘수화’를 멀리하도록 하거나 부정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 ‘수화’에 대한 정의가 ‘언어’의 위치에서 ‘보조 수단’이라는 위치로 추락하듯, 하나의 현상이나 불변의 사실에 대한 개념의 전환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어떠한 방향으로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 전환들로부터 본인의 정체성을 형성해 나갑니다. 때문에 인공와우수술을 받을 농인은 자기 자신을 굳건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몸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자기 경험에 대한 가치가 함부로 휘둘리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 또한, 앨리스는 몸이 길어졌다가 줄어드는 등 혼란스러운 경험과 그것으로 인해 재미를 느끼지도 하지만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목이 뱀처럼 늘어났을 때 비둘기가 ‘상관없다’라고 하자 앨리스는 ‘그건 나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야’ 라고 즉각적으로 반응하죠. 마찬가지로 인공와우수술의 전후에 따른 농인의 정체성 변화에 대해 그저 외부인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눈여겨보지도 않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농인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외쳐야 합니다.
     
  • 더구나 이야기가 진행이 되어 쐐기벌레를 만날 때도 ‘몸의 변화’와 ‘정체성’이라는 화두를 놓지 않습니다. 쐐기벌레는 집요하게 ‘너는 누구지?'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앨리스에게 얼마 정도 컸으면 좋겠는지 묻지요. 여기서 앨리스는 우리가 첫 번째로 살펴보아야 할 아주 중요한 대답을 합니다.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자주 ‘변하는 게’ 문제라고 하지요. 인공와우수술의 위험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되어 있는 기존의 농인 정체성을 인공와우수술로 인해 다시 허물고 재정립해야 하는 어려운 요구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합니다.
     
  • 우리들은 살면서 수많은 정체성을 ‘경험과 학습’을 통해 완성해 나갑니다. 그 작업은 아주 천천히 진행되는데 보통 자아 정체성을 찾아가는 나이를 우리는 태어나서 흔히 10대에 완성된다고들 합니다. 그 과정은 쉬운 것이 아니어서 10대를 ‘질풍노도’의 시기라고도 불리지요. 그만큼 ‘정체성’이란 긴 시간과 많은 노력을 통해 완성시켜 나가야 하며 그만큼 쉽지 않는 작업이라는 점을 시사합니다.
     
  • 그런 관점에서 시선을 돌려보면 선천적 청각장애인에 비해 중도청각장애인이 사회적응을 유난히 더 힘들어 하거나 자기 신체에 대한 정체성에서 많은 혼란이 일어나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지요. 때문에 인공와우수술의 시도는 어쩌면 삶의 완숙미가 우러러 나오는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 좀 더 바람직할지 모르겠습니다. 또한,  의학적인 관점에서만 주목하여 이루어지는 인공와우수술의 여부를 ‘정체성의 혼란과 지난한 형성과정에서의 노력’이라는 측면에서도 신중하게 고려해서 결정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 여하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극적이고 평온한 삶에서 갑작스럽게 큰 파도같은 ‘변화’를 앞두고 ‘정체성’의 안정감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지각해야 합니다. 따라서 와우수술의 이후에 이루어지는 의학적 재활의 조치뿐만 아니라 자기 몸의 변화에 따라 정체성의 인식 또한 자연스레 안착할 수 있도록 심리적인 지원이 필연적으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이 학계나 교육에서 집중적으로 고민하고 다뤄야 할 주제일텐데 조금 아쉽습니다.
     
  •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쐐기벌레의 도움을 통해 자신의 몸을 스스로 상황에 맞추어 능숙하게 조절할 수 있게 된 앨리스가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앨리스는 들판에 서 있는 작은 집을 보며 무척 큰 자신의 몸을 보고 놀랄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 적당한 키로 줄이고 나서야 용감하게 작은 집으로 다가섭니다. 이는 일정한 상황에서 자신감과 안정감을 주는 자신의 정체는 타자와 함수 관계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 흔히들 농사회에 속한 농인들은 인공 와우수술을 받은 청각장애인들에게 은연중에 적대감을 드러내거나 비하하는 등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해있고, 설사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친구로서 받아들인다하더라도 본인이 인공 와우수술받는 것에 대해서는 이질감과 함께 완고한 거부까지는 감추지 않습니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멀리해서는 긍정적인 화학작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 그러나 앨리스의 경우에서 보았듯이, 인공와우수술 이후에도 자신감과 안정감을 가진 정체성을 유지한 농인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모두 포용할 수 있을 정도의 큰 지경을 가졌을거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더욱 인공와우수술을 받은 청각장애인을 거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들을 받아들이고,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경험을 공유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농사회가 발전할 수 있으며 다채로운 색깔로 주변을 채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장애에 대해 억압적이고 차별하는 사회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의 또 다른 나(인공와우수술을 받은 농인들)에 대한 깊은 헤아림과 넓은 가슴으로 안아 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그런 상호작용이 바람직하게 성립될 때 인공와우수술을 받은 농인들이 자기 정체성을 안정감있게 찾아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겁니다.
     
  •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을 다시 해봅시다. 나비 애벌레의 정체성은 나비의 정체성과 같을까요? 만약 다르다면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까지의 겪었던 수많은 눈물과 노력들을 통해 구성된 정체성으로부터 우리는 배울 것이 없을까요? 앨리스의 모험담에서 해답의 열쇠를 찾아낸다면 우리가 인공와우수술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가지 힌트를 얻을 있을겁니다.

    다음 영상에서는 보청기 인공와우 수술을 하면 소리가 어떻게 들릴지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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