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착용했으니 어쩌면 거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나의 '보청기'에 대해 글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짝 기록을 남겨 본다.
5살 나이 때 동산 병원에 가서 청력 검사를 했었다. 특이하게 생긴 인형과 평범한 장난감이 들어 있는 사방이 막힌 방에 나를 데려다 놓더니, 그 중에 자동차 장난감을 내 손에 쥐어 주고는 밖에 나갔다. 창문 밖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 신나게 놀고 있다가, 어떤 묘한 느낌에 다시 창문을 바라보니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님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받았던 청력 검사가 '시각강화청력검사' 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세월이 흘러 특수교육을 전공하게 된 이후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 때 나는 어떠한 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던 것 같다. 검사를 끝나고 나왔을 때, 나는 그 자동차 장난감을 가지고 싶다고 떼를 썼었고, 어머님의 눈가는 빨갛게 되어 있었다. 그 다음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떼를 쓰다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88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어느 날 그 당시 8살이었던 나는 박스형 보청기 사용 방법에 대해 어머니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명함 크기의 박스형을 가슴에 차고 이어폰 잭을 꽂은 후 이어몰드를 귀에 강제로 밀어 넣고 전원을 키면 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나는 눈물을 흘리며 거부를 했었다.
무엇보다도 이어몰드의 크기가 성인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모형 밖에 없었고 더구나 외이도 형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통짜 모양의 이어몰드여서 착용시 귀가 너무나 아팠다. 더욱 괴로웠던 것은 음역대별로 소리 조절이 불가능한 그 당시 아날로그 보청기여서 볼륨을 올릴 경우 모든 소리가 뭉개져서 괴물이 고함을 치는 듯한 소리만 고막 앞에서 춤을 추었다.
착용을 거부하며 보청기를 떼었더니, 어머님의 속상한 표정과 함께 눈물과 손길이 매질처럼 나에게 쏟아졌다. 뭔가 모를 분위기를 직감한 나는 보청기를 계속 착용하는 그 길만이 어머님의 눈물을 거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절로 깨우친 후, 그 다음 날부터 무척 괴로운 보청기를 착용하고도 표정으로는 이를 드러내지 않는 방법도 자연스레 터득하게 되었다.
하지만, 120데시벨이 넘을 정도로 계속 큰 소리로 고주파수 하울링이 생기는 소리를 감당하지 못해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넓은 들판을 찾아 헤맸다. 바람조차 잔잔했을 그 곳에서조차 가슴에 찬 박스형 보청기의 마이크와 옷깃이 계속 스치는 소리마저 큰 소리로 증폭되어 들려서 무척 괴로웠다. 뭉크의 절규가 어린 8살의 속마음이었다.
초2 어느 저녁 때 아버지의 오토바이를 타고 온 가족이 반월당에 있는 보청기 센터에 갔었다. 그 당시 비록 아날로그이기는 하지만 귀속형 보청기가 새로 나왔다고 보청기 회사마다 선전을 하였는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어떤 외국 할아버지가 귀속형 보청기를 끼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이 부시 대통령이었음은 역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다.
나의 외이 형태에 맞게 귀속형을 제작하기 위해 이어몰드를 뜨면서, 커다란 박스형 보청기가 손가락 첫 마디만한 크기로 줄어든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았다. 이전의 박스형 보청기가 마치 커다란 드럼 소리과 트럼펫으로 귓가를 괴롭혔다면, 호기심 끝에 착용한 귀속형 보청기는 공기의 미립자들이 서로 충돌하는 소리까지도 증폭하여 나의 고막을 괴롭혔다.
그러나, 이 때도 나는 웃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귀속형을 끼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과 어머님의 살짝 쥔 두 손 사이를 비집고, 보청기 센터 사장이 계속 '소리가 잘 들리지?' 라며 묻고 있었다. 하루 3시간 주무시며 주간과 야근을 모두 자진해서 월급을 벌어오는 지친 아버지의 지친 어깨와, 몸이 약하셨던 어머님의 누운 자리가 차지하는 집안의 무거운 공기의 무게를 나도 희미하게 눈치를 챘었다. 그래서, 차마 '소리가 괴롭다'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잘 들린다'는 나의 거짓말을 뒤로하고 오토바이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날 저녁은 아직도 나의 뇌리에 선명하다. 오토바이 엔진음 때문인지 세상을 뒤엎을만큼 커다란 굉음이 우주를 탄생시키던 그 폭발음처럼 나의 귀를 연신 때렸고, 그 고통을 나는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참았다. 눈물을 흘렸을 땐, 바람이 눈에 들어가서 라는 핑계로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나의 청력 수준을 감안해보면 귀걸이형을 선택함이 온당했으나, 부모님께서는 왜 귀걸이형을 선택하셨을까. 보청기를 감출수록 보이지 않는 장애가 시야에서 사라진다고 생각하기에는 나의 어눌한 발음은 실존했고, 대화를 알아들을 수 없어 아둔하게만 보여졌을 나의 행동은 부모님의 가슴에 생채기로 흔적처럼 남을텐데 말이다. 더구나 가냘픈 몸으로 내가 필요로 하는 고출력의 소리를 뿜어내느라 귀속형 보청기는 쉽게 고장이 나거나 노후화 속도가 상당히 빠르게 진행이 되었다.
귀속형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다. 성장기에 있는 나의 외이도는 딱딱한 귀속형 보청기의 이어몰드를 견디다 못해 염증이 생겼고, 부드러운 귀 연골은 플라스틱이 강요하는 폭력을 감당하느라 연신 피를 흘렀다.
더구나 들판을 달릴 때 뺨을 부드럽게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감촉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나에겐 이마에 맺는 땀과 습기가 늘 동반되었는데, 그것이 귀속형 보청기에 침투하여 앰프와 비싼 보드를 망가뜨리기 일쑤였다.
초등 5학년때까지는 귀 양측 모두 보청기를 쓰다가, 6학년 이후에는 왼쪽만 착용했다. 양측 청력이 모두 감음신경성 난청이긴 하나, 오른쪽은 100데시벨이여도 반응이 없고 왼쪽은 가청 음역대의 고주파영역대에서 80~90데시벨이다보니 양측 보청기를 쓸 경우 되려 감각의 불균형이 발생했다.
오른쪽 청력은 마치 투명한 물감으로 진하게 채색하는 느낌이라면, 왼쪽 청력은 먼지 티끌만한 물감을 호수만한 물통에 풀어서 아주 옅게 채색하는 느낌이랄까. 세상을 소리로 채색하는 두 가지 붓의 농담이 이토록 다르니, 그 결과물은 자뭇 어지러웠다. 차라리 끊어질 듯 가느다란 붓 하나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어머님께서는 그런 나의 선택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으셨다. 포기하셨던걸까. 이해를 하셨던걸까.
첫 직장 생활의 월급으로 구입을 했던 보청기는 귀걸이형으로 선택했다. 애초에는 귓 속에 맺히는 습기로부터 쉽게 망가지기 일쑤였던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심이 강렬했다. 여자 청각장애인들이 이중 삼중으로 보청기를 감추기 위해 이용했던 긴 생머리를 살짝 부러워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면 무척 놀랄 일이지만, 본의 아니게 귀걸이 보청기를 통해 나의 장애를 드러내면서 왠지 모를 쾌감을 느꼈다. 장애는 감춰야 한다는 사회적 불문율에 내가 소소하게나마 '장애를 드러냄'을 통해서 반기를 들 수 있다니.
보청기 음역대별 피팅에 대한 평가와 재수정 요구가 가능하게 된 것은 대학과 대학원 시절 청각학과 음향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을 쌓고 난 후였다. 어린 시절은 보청기를 처음 착용했을 때 고막을 찢을 듯이 큰 소리가 원래 자연음이 그러한 줄로 착각했었다. 자연스럽지 않은 보청기의 증폭 음이 실체의 음인줄 알고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을 짚어 보면 억장이 무너진다.
가끔 유튜브를 보면 보청기를 처음 착용하고 들리는 첫 음에 빙긋 웃는 아기가 나온다. 그러나, 나는 알고 모든 청각장애인 성인들은 다 안다. 보청기로 증폭되는 그 소름끼치는 고음이 아기의 귀를 찢어 발기고 있다는 것을. 아기는 자기를 보고 웃는 엄마의 표정 때문에 빙긋 웃는 것이지 소리 자체 때문에 웃는 것이 아님을.
어린 아이가 적절한 보청기 증폭음을 판단하고 청능사에게 특정 주파수음을 조절해줄 것을 요청하기란 정말 어렵다. 결국, 이 세상 모든 청각장애 영유아들은 자기 청능 수준에 맞지 않는 보청기 증폭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어린 시절 어깨 위에서 잠시 쉬다 가는 바람의 소리를 통역해주고, 나의 딸이 잠결에 칭얼거리는 소리를 부드럽게 전달해주는 보청기와 함께 한지 어느덧 40여년이 흘렀다. 아마 내가 죽고 관 속에 들어갈 때 보청기도 함께 넣어달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저승에 가서도 사람들과 대화하려면 보청기가 필요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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