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영화 '코다'

굴레를 벗어나 2021. 8. 15. 20:10

'코다(coda)' 영화가 상영되었다. 코다(coda)는 '농부모를 둔 자녀'를 뜻하는 약어다. 사실 코다를 다룬 영화는 '농'을 다룬 영화보다 의외로 더 많다. 아니, 더 거칠게 말하자면 '농인'을 다룬 영화보다 '농인을 둘러싼 객체로서의 주변인을 주체로 내세운' 영화가 더 많을게다.

그 중에 대중적으로 유명한 영화로는 역시 코다 이야기를 다룬 '비욘드 사일런스'가 있고, 청각장애 자녀를 둔 청인 아버지의 '홀랜드 오퍼스', 한국에서는 김진유 감독의 코다로서의 자서전적인 '나는 보리' 영화가 있다. '농인'을 다룬 영화는 '트라이브',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나마 조금 알려졌다고 하지만, 그 마저도 '농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지면을 통해 다뤄 보겠지만, '농인'보다 '그 주변인'에게 더 관심이 몰리는 기묘한 현상은, 현실에서도 동일하다. 예를 들어 코로나 시대의 농인의 우울증에 대해 청인 수어통역사가 인터뷰 하는 식으로 농인 주체를 늘 사변화하고, 타자화한다.

이번에 나온 '코다' 영화는 더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영화 흥행 문법을 그대로 지킨다. 영화의 결은 '비욘드 사일런스'와 거의 다르지가 않다. 코다로서의 주인공은 음악을 좋아하며, 농부모와 갈등이 고조되다가 어느 시점에 '농부모의 청인문화 수용'을 통해 해결되는 일련의 과정을 어김없이 따른다. 나는 그 점이 매우 불편했었다.

코다가 농부모의 일(영화에서는 어부)을 도울 수 밖에 없는 기능적 한계(무전기를 대체할 수 있는 장비나 술 자리에서의 통역 등)은 여전히 그대로 두고, 오로지 농부모가 청인 자녀의 꿈을 방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는 것으로 끝이 난다.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농인 엄마가 청인들과 친하게 지내는 장면과 농인 오빠가 술자리에서 청인들과 즐겁게 노는 장면이 나온다. (500원 걸테니 그런 농인이 있으면 나에게  데리고 오라)

현실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잘못되었다. 영화는 이런 오류를 조금도 검토하지 않는체 그대로 따라간다. 결국, 갈등의 대한 모든 책임은 '농인' 부모에게 전가한다. 농인 부모가 좀 더 적극적으로 청인 사회에 끼어들어 웃고, 즐기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애초에 '코다'를 둘러싼 현실에서의 갈등과, 영화 속에서의 갈등 구조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런 섬세한 차이를 이 영화는 무시하고 건너 띄었다.

이 영화는 '코다'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실제 '코다'의 고민과 갈등을 식상하게 표현하면서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코다'와 '농부모'간의 갈등은 그 얽킨 실타래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전혀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  

갈등 구조를 확산하고, 재생산하는 주범은 가만히 숨어서 조소만 짓고 있고, 돈벌이 수단으로 중요한 어선이 벌금으로 팔릴 지경이 되면서도, 영화는 카타르시즘의 시작을 아버지가 딸의 목에 손을 대며 노래를 느끼는 것으로 허무하게 뒤덮어 버린다.

영화 후반에 가면, 아버지가 수어를 모르는 직원을 채용하며 일을 가르치는 장면도 나온다. 그것을 보며 딸은 미소를 짓는다. 과연, 그게 갈등이 해소되는 방식인가? 수어를 모르는 직원에게 수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육체적으로 고단한 고기 잡는 일을 한다는 것이? 농부모는 끝까지 사회 제도 시스템에서 그 어떠한 지원을 받지 못한체, 오로지 모든 것을 수용한다. 헛웃음이 나온다.

수십년전 그나마 '비욘드 사일런스'는 '코다'의 삶을 알리는 태초의 선언적인 역할이라도 했었다. 그런데 이번 제목부터 '코다'를 이야기하면서  '비욘드 사일런스' 영화의 문제의식에서 1cm도 나아가지 못했다. 다만, 주인공의 수어 연기가 그나마 봐줄만했다는 정도? 나에게는 그저 그런 아류작였다.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그 어떠한 상상력도 자극하지 않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1분 후에 일어날 서사를 모두 다 맞추었다. 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