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장애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언어의 이질적인 면이 부각되어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전락하여 유독 '타자화'되기 쉬운 영역이 '청각장애와 자폐장애'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일반화 오류, 확증편향의 오류일 수 있겠지만, 여러 장애 영역이 어울리는 가벼운 술자리에서조차 유독 '청각장애인'만 소리의 공명에서 투명하게 비껴 가는 것 같은 축적된 저의 경험이 실증합니다. 성인 자폐성 장애인의 특정 행위에 대해 공포나 혐오에 가까운 주변 반응도 그러합니다.
사실, 얼마 전에 장애 차별 철폐를 위한 단체의 회의에 비장애인,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그리고 청각장애인인 제가 참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자통역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회의 시간 내내 저는 의도치 않은 배제를 당해야 했고, 발언은 한 마디도 못했지요. 묘하게도 그 자리에서 소외되었거나 부재중인 장애인은 청각장애인과 자폐성 장애인 뿐이었습니다.
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닫힌 존재들이 되려 역차별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지요. 제가 극도로 싫어하는 상황에서 2시간 가량 침묵을 지킨 체 시간을 허비해야 했습니다. 조용히 참다가 인사를 하지 않은 체 몰래 나갔습니다. 제 딴에는 '착한 장애인의 위선과 가식'으로 주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준 셈이지요. 여기서 제가 배제당해야만 했던 이유가 '장애'의 다름 때문이었을까, '언어'의 다름 때문이었을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회의에 참석을 하지 못했거나 소외되었던 청각장애와 자폐성 장애의 두 사이를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자리매김을 하면서도 서로 공통분모로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바로 '언어'이겠지요. 즉, 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청각장애인과 전두엽 대비 측두엽과 후두엽의 발달로 '듣는 것'이나 '읽는 것'보다 '보는 것'을 중심으로 의사소통이 이뤄지는 대부분의 자폐성 장애인을 살펴보았을 때, '언어'는 타자와 관계 설정과 갈등 조건이라는 문제를 동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를 뜻하는 'society'는 라틴어 'societas'에서 온 말로 '동료, 동업자'를 포함한 친근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친근한 사람들의 관계는 일차적으로 '언어적 동질성'을 기반으로 합니다.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교포 2세보다 '타일러'라는 외국인에게 더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한국인보다 더 유창한 그의 한국어 실력 때문이겠지요. 이처럼 언어는 구조주의 언어 학자들에 의해 이원적 대립 또는 이항 대립적 세계를 투영합니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의미들의 체계 또는 사회라는 공동체 내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의 집합체라고 할 때, '공유되는 의미'와 '이해될 수 있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함의를 살펴봐야 합니다. 언어는 특정 공동체의 정체성을 공유함과 동시에 더 나아가 특정된 집단의 정체성을 반영한다고 할 때, 서로 다른 언어의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만으로도 타자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전이하기에 충분할까요? 저는 그것이 순진한 착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국말을 잘하는 타일러에 대한 한국 사회의 소속감과 포용과는 반대로 수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농인이 한국 말을 구사하더라도 느끼는 소외감과 배제는 여전히 잔존합니다. 왜 그럴까요? 수어라는 언어를 사용하는 주체가 '멸시받기 쉬운 장애인'이어서 일까요? 그렇다면 '청각 장애를 배려한 통역 제공'이 이루어지면 차곡차곡 쌓인 서글픈 감정이 눈 녹듯이 사멸할까요?
실제 우리는 흔히들 번역이나 통역을 통해 서로 다른 언어의 범주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독일 출신의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와 그의 제자 벤저민 리 워프는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무지개의 띠가 몇 개인지 조사를 하였는데 대답은 제각기 달랐다고 합니다. 사피어와 워프는 이 설문 결과에 기대어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에 얽매인 채 세계를 경험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이 판단으로부터 '우리는 우리 모국어가 그어 놓은 선에 따라 자연세계를 분단한다'는 워프의 유명한 발언이 나왔지요.
언어가 의식을, 사고와 세계관을 결정한다는 이 견해는 사피어-워프 가설 또는 언어결정론이라 불리며 그 뒤 언어학과 인지과학의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물론 저 또한 언어결정론자의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언어결정론자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실어증 환자는 사고라는 자체가 없다는 뜻이 되니까요. 이 얘기는 차후에 다른 자리에서 다루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언어결정론자의 주장에서 한 가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내 언어의 한계들은 내 세계의 한계들을 뜻한다' 라고 했습니다. 청각장애인이 사용하는 수어 '~파'의 동작과, '연습' 동작에 담긴 서글픈 역사와 분노의 감정은 단순히 '통역' 만으로 온전히 전달할 수가 없습니다. 수어를 제대로 배우신 분을 제외하고는 '연습'이라는 수어의 어원에는 '교사의 입 모양을 따라 말하도록(구화) 강요당했던 역사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고 계신 분은 매우 드물 것입니다.
장진권 선생님은 '한국수화여행'에서 '연습' 수어 표현에 대해 '반쯤 구부린 손 모양은 고된 훈련임을 말하며, 돌린다는 손 방향의 의미는 끊임없는 반복훈련을 강조하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다. 이는 구화 연습을 철저히 하라는 의미의 수화기호로서 우리 나라 말고 세계 어느 곳에 이런 '구화 연습'이라는 이유로 만들어진 수화기호의 표현이 또 있을까?' 라며 지적을 하였지요. 이처럼 농인과 청각장애인에 대한 청인 사회의 언어적 억압과 거기에 따른 농인들의 내제된 분노가 '수어' 동작에 깃들어 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수어의 어원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이는 드뭅니다.
이런 상태에서 청인들이 '연습'이라는 어휘를 수어 통역이나 문자통역을 통해 청각장애인과 농인에게 전달되었다 치더라도 받아들이는 감정의 폭과 사유의 깊이는 청인과 농인은 너무나 다를 것입니다. 그 간격은 너무가 넓고 깊어서 오해가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각자의 언어를 완고히 고수하고 있는 상태에서 단순히 수어 통역, 문자 통역 등의 편의 제공이 이뤄진다고 해서 서로의 세계와 사고의 틀을 쉽게 넘을 수 있다고 보지 않는 거지요. '통역'이라는 중간 다리를 거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서로의 언어 세계를 탐색하고 공감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를 더 짚어 보자면, 두 언어가 사회적 기능에서 차별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농인이 수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사용하는 것은 사회 생존을 위해서라도 당연시 여기면서, 반대의 경우는 매우 어색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청인이 수어와 한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당위성은 주류 사회라는 압도적인 지위 때문인지 자연스레 묵살되기 일쑤 입니다.
청인들은 되려 우리 농인들에게 언어적 차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오디즘으로 상징되는 구화주의와 인공와우 수술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관계의 원활함을 위해서 어느 한 집단만이 성급하게 언어적 차이를 극복해야 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사회적 관계의 평화는 그런 극복이 아니라, 인간 관계를 위한 다양한 성찰과 공감의 병행으로 얻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오히려 섣부른 극복은 서둘러 현실을 은폐하고 청각장애인 개체에 대한 청인 사회의 집단적 폭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어적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언어적 차이들을 어떻게 공존하게 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합니다. 즉, 어느 한 집단에게만 강요되는 극복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들의 공존에 대한 지혜가 필요합니다. 공존의 지혜와 함께 차이와 복잡성은 언어적 다양성으로 아름답게 꽃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 사회의 편협한 문제는 아직 언어적 다양성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한 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의 별들은 멀리서 보면 모두 하나의 점으로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개개의 별에 다가설 수록, 세세하게 알게 될 수록 별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의 별들은 다 똑같다'라고 하는 사람은 우주의 진리를 깨닫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음성 언어에 기반한 한국어와 시각 언어에 기반한 수어에 대한 '언어'의 구별성을 명확하게 인지를 해야 합니다.
소리 언어와 시각 언어의 차이, 청인 사회와 농인 사회의 차이를 '우주의 구성'을 보는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회 속 각 개인은 우주 속 별과 같습니다. 어떤 하나의 고정된 시각에서 거리를 두고 보면 모두 같아야 하지만, 사실 각각의 별들이 개성을 가지고 우주 구성에 참여하듯, 각각 개인은 차이를 가지고 사회 구성에 참여합니다.
다시금, 그 '장애차별철폐를 위한 회의' 때의 시간으로 돌아 가 봅시다. 서로 얼굴을 맞댄 긴 시간 동안 어느 누구도 저에게 '수어'로 인사를 하지 않더군요. '문자통역'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문자 통역만으로도 서로의 개체성과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요? 오히려 그런 편의 지원이 청각장애를 타자화하고, 배제하지 않았는지 성찰해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세계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언어습득'은 오늘 날에도 많은 언어학자들의 숙제이니까요. 더구나나 언어 구조 자체가 생소한 '소리 언어'와 '시각 언어'라면 더더욱 그 언어 세계를 탐색하는 작업은 지난할 것 입니다.
그러나 '습득'에서 '습'의 한자는 날개 '익'자와 스스로 '자'자가 결합한 글자입니다. 스스로 끊임없이 날개 짓을 하여 날아 오르는 것을 '습'해서 '득'한다 라고 한다면, '배려' 또한 가정에서 끊임없이 반복된 과정을 통해 '습'해서 '득'해야 하지 않을까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이런 단계를 거쳐야 '공감'이라는 감정적, 이성적 영역까지 확대해갈 수 있습니다.
언어는 의미를 공유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서두에 언급했습니다. 단순히 '통역'이라는 편의 지원만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의 의미를 공유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통역을 통해서 청각장애인을 '언어의 소수성'으로 제한시켜 타자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자이다' 라고 했습니다. 전유된 기억과 언어의 한계를 '통역'이라는 편의지원에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언어에 대한 존중과 공존으로 넘어서기를 빌어봅니다.
'- Philosop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는 무엇일까? (0) | 2021.10.07 |
---|---|
이 땅 위 모든 코다(딸)에게 전하는 농인 아빠의 진심('나는 코다입니다'를 읽고) (0) | 2021.10.07 |
들리지 않는 자의 외로움에 대하여 (0) | 2021.08.27 |
영화 '코다' (0) | 2021.08.15 |
보청기에 대한 단상 (0) | 2021.08.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