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조리한 생의 한 가운데서 나의 삶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그럴 듯하게 느끼게 될 즈음이었다. 나의 귀에는 '고요'가 악다구니치다 지쳐 '고요'해지다가, '고요'로서 '고요'를 깨뜨린 순간 그 '고요'는 순식간에 들고 일어나 맹렬한 기세로 나의 시야를 가로 막고 가슴을 출렁거리게 했다. 그 '고요' 때문에 나의 심장은 잠시도 '고요'할 겨를이 없었다. 수많은 의문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견디기가 평생의 짐이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삶이란, 마치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의 밤 하늘 외로이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부유하듯이 고독하게 건너는 낙타의 심정이랄까.
체화할 수 없는 '분노'와 '체념'이 달음박질 하듯 연이어서 나타나고 사그라지기를, 수미산에 쌓인 돌멩이 수만큼 반복하니 그 흔적은 풍화되어 아무런 의미와 희망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납득할 수 없는 그 소리는 나의 몸 속을 가득 채웠고, 해독할 수 없는 그 소리는 해독되지 않는 체 흘러나와 그렇게 나의 청춘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파일럿을 꿈꾸었던 아비의 젊은 날의 희망은 그렇게 어둠 속에 스러졌다. 슬픔은 비빌 곳이 없어 바닥에 쌓여 눈물처럼 더덕더덕 젖었다.
우연찮게 들어선 위에서 차츰 굳어있는 응어리를 풀어놓을 수 있게 된 것은 귀한 딸, 너의 울음소리였다. 너는 스치는 바람같은 가냘픈 울음 소리로 들리지 않는 아비의 시선을 어둠 속에서 조차 너의 곁으로 끌어 당겨 놓았다. 너의 신묘한 그 울음 소리로 들리지 않는 아비의 오래된 슬픔을 덮었다. '고요'를 형벌이라 느꼈었는데, '고요'하게 자는 너의 모습이 그렇게 황홀한 줄은 처음 깨우쳤다. 너와의 첫 만남이 꿈속의 일처럼 아득하게 다가왔다.
네가 커가면서 들지지 않는 아비의 귀를 대신해 들리는 너의 귀를 앞세워야 했던 어쩔 수 없는 첫 날이 다가왔었다. 젊은 날 아비의 하루를 맴돌며 심연을 가늠케 했던 무미건조한 '고요'가 또 다시 해독할 수 없는 소리로 귀한 딸 너의 곁을 침범하는 순간이었다. 그 날 밤 아비의 몸 깊은 곳에서 울어지지 않는 깊은 울음이 소리 죽여 흘러나와 젖었다. 몸이 울음에 실려 출렁거렸고, 떨림이 슬픔보다 더 깊어 몸 속에서 끓어올랐다.
지금 새근새근 자는 어린 너의 입술에는 오로지 온순하고 따뜻한 입김만이 가벼움으로 드나드는데, 몇 십년 후 철이 든 너의 입술에는 '코다에게 씌여진 통역의 무거움'이 운명처럼 드나들겠구나. 슬픔을 받아들이는 힘으로 운명을 열어가는 것이므로, 너와 아비의 이런 운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슬픔조차 받아들일 수 없겠구나. 받아들여야 하는 슬픔으로 운명처럼 다가 올 철든 이후의 너의 모진 말이 부디 아비의 견딜 수 없는 슬픔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더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경찰서에서 절규하는 현화의 채워지지 않는 울음, 사랑했던 연인의 입에서 자기 부모를 부정당한 보라의 슬픈 이별, 아비의 소외와 이해할 수 없는 응어리를 온 몸으로 감당해야 했던 지성의 분노, 수경, 코다통역사로서 지니는 청각 능력을 농통역사로부터 비난 받아야 했던 수경, 귀한 딸들이 좌절하고 쓰러지는 그 모든 순간에 아비는 허다한 위로의 말이 지닌 그 공허함을 알기에 '고요'가 운명처럼 아비의 귓가에 머무듯이 '침묵'만이 숙명처럼 아비의 입가에 머무른다. 어느 것 하나 괴롭지 않는 것이 없다. 아비의 삶이 그렇듯 너 또한 고단하고 지난하고, 차마 위로조차 가당치 않은 비애가 너의 글에 가득하다.
너는 어렸을 때의 일인지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아비는 석사 학위에, 학교 부장 교사 등 남부럽지 않는 사회적 직위와 학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각장애'를 이유로 고작 놀이 기구를 타지 못하는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전락하는 창졸한 곤경이었다. '거부'와 '멸시'와 '냉대'가 말하는 자와 듣는 자의 전유물이고, 그것을 감당하는 것이 아비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임을 체득화된 순응으로 감당할 수 있었으나, 그런 모습을 너에게 보여 준다는 것은 매우 한스럽고, 감당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 날 나의 상처는 사랑하는 딸, 너의 앞이었다는 점에서 다른 젊은 날의 상처와 결이 달랐다. 그 때 나의 모습이 딸에게 비굴해보였을까, 처참해보였을까. 부박해보였을까. 직원을 향해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의 아비가 무서웠는지, 놀이 기구를 타지 못해서였는지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는 그 날 너의 눈물의 근원은 이루 짚을 수가 없었다. 날칼로운 가스 경보음이 연이어 울리면서 공포를 하나씩 토해 내는데, 들리지 않는 아비를 두고 그 두려움을 홀로 온전히 자그마한 몸에 담아야 했던 너의 떨림도 기억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아비로서 죄스럽고 한스럽다
다만, 아비의 '청각장애'가 아비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듯이, '코다'라는 너의 또 다름 이름도 너의 잘못이 아니다. 아비가 아비 될 연습을 하지 않았듯이 너 또한 '청각장애'를 가진 아비를 만날 연습 또한 하지 않았을터이니 서로에게 연습할 시간을 주렴. 그 연습 후에야 네가 가늠해지지 않던 것들이 이해가 되는 언어로 다가올 때 그때서야 너의 글과 말에 따뜻한 위로를 건넬 수 있겠지. 슬픔과 위로가 꿰맨 자리 없이 포개지고 갈라져서 어느 덧 희미한 추억으로 남겨질 때 비로소 너와 아비는 웃으면서 바라볼 수 있겠지. 그러하겠지. 아비의 '고요'와 너의 또 다른 이름 '코다'는 서로 스미면서 언젠가는 웃으며 갈라설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비는 다만 더듬어지지 않는 소리의 자취와 들리지 않는 손짓의 흔적을 더듬으며 네가 사려 깊은 사람으로 장성하기를 기다릴 뿐이다. 그 때까지 이 상이한 두 세계의 건널 수 없는 까마득한 간격을 너와 함께 더불어 견디지 못할 것을 견디며 건너보려 한다. 어린 너의 해맑은 움직임과 찬란한 눈빛을 더듬으면 훌륭하게 장성한 너의 곁으로 다가갈 길이 쉽사리 있을 듯 싶지만, 아비는 그 길을 아직까지 쉽사리 더듬어 낼 수 없다.
다만, 너의 책이 아비의 작은 위로가 된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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