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신뢰하는(농인이 신뢰하는 통역사라는 수식어에는 꽤 많은 의미가 있습니다) 수어통역사로부터 연극 통역을 하고 있는데, 농인들이 즐기기에 어려움이 없는지 모니터링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본 ‘지하철 1호선’ 연극은 무려 20여년 전이었으니 꽤 오래되었지요. 베리어프리라는 단어가 생소했었을 그 당시에 내가 그 연극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인을 위한 영어와 한국어의 자막 제공이 있었기에 가능했었습니다. 암튼, 수어통역이 제공되는 연극이 대체 어떤 것일까 하는 호기심에 흔쾌히 수락하였고 당일날 설레는 마음으로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우리는 농담이(아니야)야’ 라는 제목의 연극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고자 검색을 해보았지만, 백상을 받았다는 내용이 외에는 기본 줄거리조차 쉽사리 알 수가 없었지요. 다만, 수어 통역사를 통해서 ‘성소수자’를 다룬 짧막한 얘기만 전해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연극 제목에서 ‘농담’이라는 어휘 때문인지 문득 밀란 쿤데라의 ‘농담’ 소설이 연상이 되더군요. 성소수자들의 개인적인 서사가 진행되면서 대체 무엇이 농담이고, 무엇이 농담이 아닌 진담인지에 대한 관객들의 반문은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도 읽는 이로 하여금 동일하게 반문이 이어집니다.
다들 읽어보셨듯이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서는 주인공이 연모의 대상이었던 여자 친구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자포자기 심정으로 나름 세련되게 표현했던 반어적 농담 때문에 인생이 희극적 사건에 휘말립니다. 흔히들 ‘사회주의 사회의 비판’으로만 해석을 하지만, 작가 스스로 밝혔듯이 사회주의를 한 예시로 들어 절대적 가치를 옹호하는 고리타분한 인상 군상들에 대해 실존주의 관점에서 조롱을 날린 작품이지요.
마찬가지로 연극에서도 성소수자들의 농담인듯 진담같은 농담으로 성소수자들에 대한 사회적 편견의 공고한 질서와 절대적 가치(일테면 이성주의)에 대해 조롱을 날립니다. 자궁도 요일제로 해야 한다느니, 자궁도 기계처럼 탈부착이 가능해야 한다느니 하는 시덥잖은 농담은 생리에 대해 여태껏 가벼운 농담조차 금기시 되었던 우리 사회의 혐오적인 태세를 조롱합니다. 사실, 남성인 나에게 생리에 대해 농담을 했던 여성은 더더욱 전무했지요. 자기 검열인걸까요?
연극은 처음에 자기의 기억과 세계가 무너져가는 부조리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가 부정당하는 것을 경험하면서(파스타라는 존재가 전무한 세계), 주인공은 자기 분열을 합니다. 이 때 주인공이 했던 말이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내가 경험한 감각과 느낌이 이처럼 온전한데도, 왜 그것이 타자에 의해 부정당해야 하는거지?’
이는 장자의 ‘호접몽’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장자는 호접몽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와 그 정체성을 파악하는 일차적 수단은 오감을 통해 외부 세계의 인식이라고 보지만, 그 객관적이라고 믿는 오감조차도 허상일 수 있으므로, 이를 통해 자아를 파악한다는 것에 대해 회의를 지적한 것이지요.
결국, 우리와 같은 타자는 객관적이라고 믿는 오감을 통해 성소수자들에 대한 감각적, 피상적으로 존재를 인식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해석하면 너무 벗어난 것일까요. 여성과 남성의 고유성에 대한 우리들의 관념과 사유의 틀이 사실적이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짚어 줍니다.
연극은 계속해서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들려줍니다만, 첫 에피소드의 ’꿈’ 이야기 때문인지 그 다음 얘기에서도 장자의 ‘소요유’편에 나오는 송나라 상인 이야기가 계속 오버랩이 되더군요.
송나라 사람이 ‘장보’라는 모자를 밑천삼아 월나라에 장사를 하러 갔지만, 월나라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고 있어서 모자를 팔 수 없었다는 짧막한 이야기입니다. 즉, 송나라 상인이 공유한 송나라의 공동체 규칙이 월나라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기에, 송나라 상인으로서는 자신과 타자 사이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고 그 낯섦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지요.
결국, 이야기의 핵심은 송나라 상인과 월나라 사람 사이에 합의가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송나라가 머리를 짧게 자르던, 월나라가 머리를 기르던 어떤 길을 선택하던 그것은 어느 한 집단의 규칙을 다른 집단에게 제도의 일방적 강요와 강압적 폭거가 작용할 수 밖에 없겠지요. 설령 부드러운 ‘설득’의 과정이 이어진다한들 서로가 서로에게 타자로 남아 있는 한 설득이라는 것 역시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헤게모니 갈등에서 어떤 합리적인 대화와 수단으로도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걸까요. 연극은 여성, 페미니스트, 트랜드젠더, 퀴어, 채식주의자 등의 이야기를 교차해가며 메인스트림과 아웃사이더간의 진정한 논의는 결국 중재가 불가능한 것이라는 역설을 펼칩니다.
일테면, 남성과 여성에 대한 성고정관념은 정신병원에서조차 파란 환자복과, 분홍 환자복을 통해 ‘내가 성소수자로 차별받는 것 때문에 미치겠는데, 환자복 때문에 더 미쳐야 하는거냐?’ 라는 등장인물의 비명은 한 체제의 강요가 얼마나 무자비 한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나와 타자는 관계를 맺지만 동시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 실존의 역설을 마주하면서도 장자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에 의존해 중심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길’ 이라며 조언을 던집니다.
사실, 우리는 익숙한 사회적 관념의 규칙를 수레로 삼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버리고 타자의 규칙을 받아들여 새로운 균형감각을 확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겁니다. 중요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따르면서 살아왔던 기존 체계의 수레를 자각하고, 그것을 재구조화를 해야 비로소 우리 모두가 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그들의 농담을 우리들의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그 날에 장애인과 성소수자와 저소득층과 혼혈인과 이방인 등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이 저마다의 삶을 새롭게 긍정할 수 있을거라고 응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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