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가 왔습니다. 교직을 14년 거치다보니, 애초에 품었던 지적호기심과 사명감이 정체되어감을 스스로가 느껴질 정도로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평소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가쁜 호흡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나 스스로에게 안식년(?)을 부여하고자 이번 여름 방학은 처음으로 아무런 연수나 계획을 잡지 않았습니다. 어쩔수 있나요. 나라에서 교수들에게만 부여하는 연구년의 특권을 말단 관직인 일개 교사는 스스로 찾아야 겠지요.(이 부분이 제일 아쉽습니다. 교사들에게도 연구년을 부여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방학 동안은 내가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 10여권을 구입해서 천천히 읽는 것으로 숨고르기 작업을 수행했습니다. 나름대로 책 안에서 발견한 시원한 물을 마시며 지친 육체 곳곳에 활력을 불어 넣기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고 싶은 영역에 대한 길라잡이 삼아 난바다를 향해할 지도를 얻기도 했습니다.
최종적인 저의 꿈은 흩어져 있는 농(Deaf)과 관련된 인문, 심리, 예술 및 미학, 사회, 교육, 과학을 한 곳으로 아우르는 ‘농 페러다임’의 틀을 재구성해보고 싶은 겁니다. 뉴턴은 평생을 다닌 거리가 고작 300Km내외였지만 모든 우주의 규칙을 설명하는 ‘만유의 법칙’을 세웠고, 다윈 또한 젊은 시절 항해한 것을 제외하면 평생을 고향에서만 지냈지만 ‘진화’의 견고한 틀을 세웠던 것처럼 말이지요.(저는 뉴턴과 다윈에게 질투심도 느낍니다.)
그렇다면 저의 첫 출발점은 ‘장애’가 되겠네요. 누구나 동의하듯이 ‘장애’는 ‘비극’입니다. ‘장애’를 가진 모두는 저마다 개개의 차이는 있겠지만 견딜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의 물결을 거쳐 온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을 넘어서 ‘환희’로 나아간 사람도 있고(농인에게는 대표적으로 베토벤이 떠오르겠지요), 자살로 삶을 마감한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근무했던 특수학교에서는 할아버지가 그 학생과 함께 동반자살을 한 일도 있었지요. 저에겐 ‘비극’이라는 죽어 있던 개념이 살아있는 현실로서의 ‘비극’으로 다가왔던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비극’은 어느 누구나 일부러 보고 싶어 하거나 듣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잔혹한 사진을 직면하거나 주시하기에는 우리들의 심정이 그렇게 강하지 않는 탓일까요. 뉴스에서는 그러한 사진이나 영상에서는 친절하게도 모자이크 처리까지 해 줍니다. 또한 언론에서는 ‘비극’을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을뿐더러, 다룬다고 하더라도 일시적인 것으로 머물뿐입니다. 그런데, ‘비극’이 동시대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벗어나서 ‘문학과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오히려 즐겨 찾거나 스스로 찾아서 보는 등 참 역설적인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집니다.
왜 이런 슬픔과 고통으로 마음을 괴롭히는 ‘비극’을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추구하거나 격찬을 받는 위치로 격상이 되는 걸까요? 참 신기합니다. 플라톤이 말했듯이 예술이 현실의 표방이라면 예술에서의 ‘비극’과 현실에서의 ‘비극’을 대하는 관객들의 이중적인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관점을 옮겨서 ‘장애’를 현실에서 접했을 때와 ‘장애’를 예술과 문학의 영역에서 대했을 때도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질까요? 자뭇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비극’이라고 하니, ‘비극’과 관련된 우리 인간들의 비애감과 탄식으로 젖어 있는 수많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대표적으로는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겠네요. 저는 학부시절 때 그 당시 유명했던 이윤기 선생님의 그리스 신화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즐겨 읽었던 탓인지, ‘오이디푸스’가 먼저 생각이 납니다.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라고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에 쓸 정도입니다.
오이디푸스는 신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불완전성이 빚은 비극 드라마입니다. 결국 진실이 밝혀진 뒤, 자신의 눈을 찔러 진실을 보는 인간 척도의 한계를 절감했지요. 오이디푸스는 진실을 절실히 갈망했습니다. 그것이 진심이었기에 진실 앞에서 드러날 두려움 앞에서도 어떠한 타협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이오카스테가 말렸고 자신도 불안했지만 끝끝내 자기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섰지요.
결국, 오이디푸스는 신 앞에 선 운명에 속박되는 나약한 인간의 표상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의지를 지닌 용감한 인간의 표본이었습니다. 그는 밝혀진 진실에 책임을 지고 스스로 눈을 찌른 뒤 거친 곳으로 사라지지만 부당한 운명에 온 몸으로 맞섰으며, 파멸했지만 굴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오이디푸스가 다루는 비극이라는 개념은 ‘완전성(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불완전성(운명, 장애 등)의 흔적’ 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즉, 비극의 행동은 열정, 능력, 그리고 추구하는 가치가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고귀함을 보여줍니다. 헤라클래스처럼 초인적인 능력이 아니라 극한의 상황에서도 인간이 지닌 본연의 가치를 간직한 보통 사람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문학과 예술에서 다루는 ‘비극’이라는 개념은 운명에 속박되어서 좌절하는 인간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히려 스스로가 자기 한계 안에 갇히지 않고 그것을 뚫고 나아가 더 큰 가치와 만나는 이야기가 바로 ‘비극’이라는 개념인 것입니다. ‘비극’은 운명의 굴레를 신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에게 행해지는 잔인하거나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그 정해진 운명이라는 시험으로부터 이겨내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환희에 넘쳐 노래를 부르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눈을 찌르고 광야를 향해 걸어가는 오이디푸스의 얼굴에는 비탄으로 가득 할까요? 아니면, 무서운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면하여 받아들인 승자의 얼굴이었을까요?
따라서 일상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외면하고 싶어하는 ‘비극’이라는 개념과, 오이디푸스의 이야기에서 다루는 ‘비극’이라는 개념은 아주 상이한 것입니다. ‘비극’은 오히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되며, 문학과 예술 안에서 머물고 있는 ‘드라마’가 현실에서도 이어지기를 촉구해야 합니다. 인간이 무엇이냐에 대한 근원적 질문에 당당히 맞서서 답변할 수 있는 이야기가 현실에서도 펼쳐져야 합니다.
‘장애’는 ‘비극’입니다. ‘장애’라는 속박의 굴레에서 인간의 가치에 대한 억압되거나 왜곡된 시선을 강요당하거나 진실을 덮고 그러한 현실에 근근이 살아가며 비겁하게 안주할거냐, 아니면 진실에 따라 목숨을 잃는다 해도 박탈된 인간의 권리를 얻기 위해 열정과 서릿발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현실을 직시할 것인지에 대한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장애’라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진실, 자살’의 어떠한 선택을 하던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오롯이 본인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장애’는 ‘비극’인 것입니다.
‘장애’를 가진 여러분, 오이디푸스처럼 당당하게 진실에 맞서겠습니까?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tragedy.(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비극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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