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없으니 거두절미하고 바로 본론부터 들어갈께요. 자장면은 중국음식일까요, 한국음식일까요. 어느 대한민국 국민에게 물어봐도 거의 한국음식이라고 답할겁니다. 시원은 중국이지만, 한국에 들어와서 한국 사람에 어울리는 맛으로 발전하면서 현지화된 한국음식이라는 거지요. 서적으로도 나와 있습니다. ‘한국음식문화 박물지’를 한 번 읽어 보세요. 이 책의 저자도 우리와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무엇이 한국음식일까. 저자가 내세운 한국음식이라 할 수 있는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한국의 자연이 만들어낸 식재료’여야 하며 ‘한국 국민이 일상으로 먹는’ 음식이여야 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했고 간다라 미술이라는 불교문화양식이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우리 한국 불교양식으로 발전시켰고, 그것을 인도불교가 아닌 한국불교문화로 받아들이는 것도 같은 동일선상입니다.
한국 문학의 조건이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에 대해서 서울대학교 조동일 명예교수님께서 쓰신 ‘한국문학통사’에서도 비슷한 발언을 합니다. 000 선생님의 의견에 따라 번역을 거쳐야 하는 작품은 농문학이 아니라고 한다면, 한국 문학의 범주를 이야기 할 때 옛 상고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문’으로 쓰여 진 우리 조상들의 작품 또한 우리 문학이 아니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는 조동일 교수님께서 주장하신 바와 상반됩니다. 조동일 교수는 문화의 경계는 ‘문화의 수단’이 아니라 ‘문화를 항유하는 주체’가 누구인가를 우선 순위로 매기고 있습니다.
000 선생님께서 예를 드신 해외교포2세가 영어로 쓴 한국 이민자의 삶의 소설이 한국문학이 아니라는 말씀에 대해 저는 의아합니다. ‘영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국 문학이 아니다? 그런 논리대로라면 ‘한문’으로 쓰여진 우리조상들의 작품도 모두 ‘번역’을 거쳐야 하니까 한국 문학이 아닌 셈이 되겠지요. 분명 세종이후 한글이라는 언어수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이는 국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에게서는 000 선생님의 의견에 동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즉, 저는 문화의 경계를 지을 때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점은 ‘언어의 수단’이 아니라 ‘그 속에 깃든 삶과 정체성’이 무엇이냐를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이 부분에서 000 선생님과 저의 의견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농문화 및 농문학의 일차적인 조건을 거칠게 정의하자면 ‘수어’가 아니라 ‘농인의 주체성’이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인이 ‘한글’로 미국인의 삶을 소설로 썼다면, 그건 한국 문학일까요? 미국문학일까요? 반대로 한국인이 쓴 소설을 번역해서 미국에 팔면, 그 작품은 미국문학이 되는걸까요? 그래서 언어적 수단이 우선이 되는 게 아니라 그런 언어 수단을 사용하여 담고자 하는 내용과 본질이 무엇이냐를 살펴봐야 한다는 거지요.
거칠게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를 들어볼까요? 청인중심 정체성을 지닌 청각장애인이 ‘수어’로 ‘나는 청인이다. 농인은 증오한다’ 라는 작품을 썼다면 000선생님께서는 그 작품이 ‘수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농문학’으로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농부모를 가진 코다의 농인의 삶에 대한 글은 ‘농문학 ‘입니까. 아닙니까.
정체성에 대해서 언급을 하셨으니 저도 마저 언급을 해보겠습니다. 000 선생님께서는 정체성이 ‘언제나 배타적 경계를 가진다’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 부분도 저는 동의가 어렵습니다. 언뜻 보고 해석하기에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타인과 선을 긋는 것에서만 머루는 것으로 들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정체성이란 타인과 ‘다름’의 인식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다름과 같음’을 동시에 인식하는 거라고 봅니다.
제가 다루고 있는 단원에서 ‘수어 뮤지컬’은 ‘수어 연극’의 연계에서 다루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거기서 ‘수화노래’가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원고본에서도 수화노래를 다룰 생각은 일절 없습니다만, 자꾸 수어 뮤지컬이 수화노래와 동일시하시는 것 같아서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혹시 뮤지컬이 ‘노래’만 나오는 거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뮤지컬에서는 ‘춤’도 나옵니다. ‘몸짓 표현’도 나옵니다.
그렇다면 농인이 수어뮤지컬을 한다고 할 때 어떤 장면이 벌어질까요? 수동적으로 청문화 중심의 뮤지컬을 차용하는 식으로 끝이 날까요? 물론 여태껏 지속되어온 수어뮤지컬 혹은 수화 노래가 그러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이 앞으로도 지속될지, 아니면 농문화의 어떤 특질과 함유시켜 독특한 수어뮤지컬이 탄생하게 될지는 계속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저는 그래서 서대문복지관에서 농인들이 힘을 모아 ‘수어뮤지컬’을 공연한 것에 대해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농문화와 청문화의 긍정적인 만남이 어떤 결과물을 내놓을지 농인으로서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새롭게 만들어 내놓은 농문화 양식(수어 뮤지컬)은 분명 ‘농인’이 주체가 되어 ‘농인’의 삶을 다루게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을 농문화 및 농문학의 한 장르로 받아 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주체성과 당위성과 시대성 어느 부분을 살펴봐도 농문화가 아니라고 할 근거는 없습니다.
농인이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쳐 새롭게 만든 ‘수어뮤지컬’ 예술 장르가 농문화가 아니라 청문화라면 앞으로 우리 농인들이 어떠한 문화양식을 시도하던, 그것은 농문화가 아니게 되겠지요. 그렇게 되면 오히려 농문화의 힘을 말살시킬 위험이 있습니다.
00 선생님의 생각을 따라가면 ‘수어시’조차도 농문학이 될 수 없겠지요. 엄연히‘시’에서는 ‘운율’이라는 청각적 요소가 분명히 들어가 있고 그 청각적 요소인 ‘운율’을 ‘수어’의 리듬과 크기, 방향으로 표현한들 어디까지나 청문화인 ‘운율’을 표현한 것 뿐이니까요. 그래서 000선생님의 의견에 제가 동조하기가 어렵습니다. 시나 뮤지컬에서도 분명 청각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수어+시= 농문학이고 수어+뮤지컬=청문학이라는 도식은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따라서 수어시가 농문학이라면, 같은 관점에서 수어뮤지컬도 농문학이어야 합니다.
이 교과서의 취지가 ‘농문화’의 본지를 찾는 것과 동시에 ‘농문화의 발전의 모색’ 또한 품어야 한다고 봅니다. 000 선생님께서는 농인이 하는 모든 예술적 행위를 농문화로 규정해버리면 더더욱 농문화가 축소되고 시들어 버릴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오히려 그런 시각이야말로 농문화의 자생적인 힘을 무시하는 시각이라고 봅니다.
왜 학자들과 청인들은 농인의 힘을 무시하는 걸까요. 농문화는 타문화와 만났을 때 도망만 쳐야 하는 그런 식으로 여겨져야 하는걸까요? 온실 속의 화초처럼 무균실에 두어야 할 고리타분한 문화로 두어져야 하는걸까요? 푸른 들판에 놓여진 잡초처럼 스스로 강인하게 자라게끔 지켜보면 안되는걸까요. 왜 농문화, 농사회가 타문화와 만나게 되었을 때 왜 무조건 포섭당하게 될꺼라고 생각하는지요.
현재 일부 농인들이 모여서 ‘수어 라디오’ 라는 재미있는 시도를 하더군요. 라디오는 엄연히 청문화이지요. 그러나 그런 틀조차 농인들은 수어와 라디오의 만남이라는 색다른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한국 농문화의 자랑스러운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문화에 함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우리 농인의 목소리와 방법을 찾아가는 그런 모습이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러한 시도과정에 있는 우리 농인들의 문화의 영역을 과감하게 농문화로 인정하고 농문화의 확장성을 모색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이번 교과서가 추구하는 몰입정체성으로서의 집필이 아니라, 이중문화접근으로서의 다뤄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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