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한창 유행하기 전, 가족들과 캠핑을 간 그 날 야심한 밤에 나 홀로 깨어 은하수 사진 촬영에 여념이 없을 때였다. 깊은 푸른 심연 속에서 반짝이는 별빛들의 향연들에는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 같았다. 멈처진 시간속에서 지구위에 서 있는 나란 존재의 미약한 숨결과 광대한 공간들의 교향곡이 마치 일치되는 고양감은 지금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그 때, 카메라에 담긴 은하수의 모습을 보면서 빅뱅 이전 모든 만물의 시작점을 떠올려보았다. 176센티미터에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는 내 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빅뱅 시점의 수소와 헬륨의 원자일테다.
별 하나에 서로 추억을 묻은 그 사람과도, 미워서 돌아섰던 그 사람과도, 내가 상처를 줬던 그 사람과도, 본질은 똑같은 하나의 수소와 헬륨에서 같이 태어났다면 나와 세상 모든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또 다른 분신이라는 셈이 된다.
이 사실을 깨닫고 나니 서로를 분열시키고 배제하고, 차별의 기치를 상대에게 강요하는 행위가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를 측은한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누구나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자기 분신에게 칼날을 들이댈 사람은 없을터이다.
어찌보면 '사랑'이란 매우 단순할 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사랑이라는 '동사'의 어려움보다는 '대상'의 어려움을 완곡히 지적한 게 아닐까. 나와 타인을 동일시하는 것이 매우 난해한 함수 문제이겠지.
나와 타인을 서로 타자화하는 순간 빅뱅순간의 수소와 헬륨은 서로 이질적인 단순한 물질로 전락 해버린다. '불의'는 과학적 '사실'에 앞서 하나의 진리로 공고히 되어 버린다. 그래서, 사회의 장애차별적인 이 현상은 매우 서글프고 괴롭다. 자기 자신을 난도질하는 느낌이랄까.
전장연의 자하철 투쟁도 26년동안 진행되어 왔던 장애인들만의 고통을 더 이상 그들의 것만으로 선을 긋지 말고 우리 사회 모두의 아픔이라는 것을 재인지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순간이 인류 종말의 날이다.
정치는 이런 갈등 구조를 서로의 대화를 통해 이해를 하고 타협을 추구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이런 작업을 능숙히 하는 사람을 우리는 '정치인'이라고 부른다. 26년 동안 이 고통과 사회적 갈등에 대해 '정치인'들은 그들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 부분은 진보나 보수나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약자의 그것으로 제한하려는 일련의 차별적인 정치인의 발언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답답하다.
22년 우리 한국 사회는 '은하수'를 볼 자격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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