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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hilosophy

공정하다는 착각

굴레를 벗어나 2022. 4. 17. 12:33
어느 모임에서 '경증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수능시험(영어듣기)의 지필고사 대체 가능' 문구를 두고 살짝 논쟁이 벌어졌다. 나의 입장은 청각장애의 정도가 가볍거나, 보청기를 착용하더라도 어음 변별력에서 청인과 동등한 수준의 청취가 어렵기 때문에 경증청각장애인이라 하더라도 필요시 지필시험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이었고, 이를 반대하는 이의 입장은 '영어듣기시험을 지필시험으로 대체할 경우 비장애인 학생에 비해 과도하게(?) 유리하므로 '역차별'이다 라는 점이 요지였다.
 
경증 시각장애 학생과 경증 지체장애 학생을 위한 시험시간 1.5배 연장은 '공정'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독 경증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공정한 잣대'에는 왜 논쟁이 발생하는 것일까? 보이는 신체적, 물리적 손상에 대한 지원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면서, 보이지 않는 청각 장애에게만 '합리적 능력주의'를 들이대는 그 논쟁의 과정에서 나는 마음이 살짝 불쾌했었다. 다른 장애유형과 함께 일하다보면, 유독 청각장애인게는 장애감수성을 배려하지 않는 발언과 행위가 쉽사리 벌어진다.
 
어음 명료도 검사에서 비장애인의 경우 획득 점수가 90%이상이어야 하고, 경증 청각장애로 분류되는 집단의 경우 기대되는 획득 점수가 70%는 비교적 대화가 가능하지만, 탈락되는 30%의 명료도 값 때문에 중요한 맥략의 대화는 종종 놓칠 수도 있다. 즉, 경증 청각장애인이라고 대화가 원활하다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라는 뜻이다.
 
더구나, 선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을 경우 영어회화에 있어서 정확한 조음과 청취에 대해 엄청난 학습 지연을 경험해야 한다. 한국어의 발음에서도 상당한 장애를 겪는 청각장애인에게 또 다른 영어 학습에서 그 과정은 모국어보다 더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즉, 애초에 언어 학습에 있어서 청각장애인은 공정한 출발을 경험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영어회화의 가능여부를 테스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청각장애인에게는 영어회화의 지문(지필 시험)을 읽고 회화의 역량을 테스트하는 것이 왜 목적에 부합되지 못한다는 것일까? '듣기'에 방점을 찍느냐, '의사소통'에 방점을 찍느냐에 대한 영어듣기시험의 목적을 따져보았을 때, '듣기'가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청각장애인에게 타당한 시험인걸까? '의사소통'이 목적이라면, 대체수단(문자통역 등)에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청각장애인이 지필로 회화능력을 검증받는 것이 왜 불합리한 것일까?
 
이런 모든 경우를 감안하더라도, 출발의 공정함을 무시하고 과정의 공정함만 강조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 것일까? '과정이 공정하면, 결과도 공정하다는 잣대'는 일명 '능력주의' 신화와 결이 비슷하다. 집안이 가난한 자녀와 상류층 자녀의 교육환경에 대한 출발선이 동등하지 않듯이, '기회의 평등'만 강조하는 것은 이상적인 사회를 만드는데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더더구나, 제일 화가 났던 부분은 반대하는 그가 내세운 근거중의 하나가 '비장애인들에 대한 역차별' 이었다. 발목이 절단된 경증 지체장애 교사(발목이 절단되어도 경증으로 분류된다)에게 인근 학교로 우선 전보하게 끔 배려한 것이 과연 '비장애 교사'에 대한 '역차별'일까? 왜 그는 '공정'에 대한 잣대가 나와 이렇게 다른 것일까? '능력주의'에 대한 그의 신봉은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단순히 접지른 발목만으로도 당분간의 출퇴근이 상당히 힘든데, 평생 안고 가야 할 절단된 발목으로 출퇴근을 감수하라는 것이, 비장애인들의 출퇴근과 동등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는 무게의 그것인가?
 
결국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 '능력주의'에 대한 그의 신념은 먼저 능력주의 자체가 내세우는 이상이 '평등'에 있지 않음을 놓치고 있다. 그 누구도 '장애',와 '비장애', '경증장애'와 '중증장애'에 따라 억지로 '기회의 평등'을 부여받고, 모두가 똑같은 지점에서 경쟁하여 승자만 보상받을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은 타당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가장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모두가 똑같은 경쟁에 참여할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그 경쟁에 있어서 애초에 주어지는 핸디캡과 불평등은 치유하지 못한다.
 
한 가지 다른 예를 살펴볼까. 수능날 영어듣기시험중 방송 사고(신호 잡음이 나오는)가 발생할 거라 예상되는 시험장에 과연 비장애인 수험생은 아무런 불만없이 시험에 치르겠는가? 신호잡음 때문에 놓치는 영어회화의 장면이, 경증 청각장애인이 겪는 어음변별 탈락 비율과 비교해봤을 때 비슷하거나 덜할 것이라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왜 비장애인 수험생의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비해 경증청각장애인에게는 '공정한 시험'이라며 들이대는 것일까?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빨리 빠져나와야 한다. 특히 '장애'와 관련되는 '능력주의' 신화에서 우리는 당당하게 사회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함께 하는 이상향을 위해 '기회의 평등'이라는 신화를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