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나의 거실에 걸릴 한 폭의 그림을 고른다면?

굴레를 벗어나 2022. 3. 16. 14:44

2월 즈음에 어떠한 일로 장교조 위원장 집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깔끔하게 꾸민 그의 집 거실 벽에는 클로네 모네의 ‘수련’ 그림이 걸려 있었다. 몇 십년 전 모네의 전시회 때 견물한 실제 수련 연작 중 어느 하나의 그림이었다.(사실, 전시회에서 모네의 수련 작품의 실제 크기를 보고 깜짝 놀랐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 집에 걸린 ‘그림’의 묘한 공간적 무게감 때문인지 나의 눈길을 끌었다.

 모네는 말년에 백내장으로 시력을 잃은 상태에서 외부 사물의 본래 색깔과 형태를 왜곡된  정보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당시 그린 그림의 특성이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띄게 된다. 암튼, 이 사실을 알고 있는지 위원장에게 물어보았더니 워낙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실이었는지 스스럼없이 답하는 그 말 속에서 거실에 걸릴 그림으로 ‘모네’를 선택한 의도를 어렷품이 짐작해 본다. 모네 인상파의 대가답게신의 신체적 한계에서  곡된 감각의 각정보조차 재해석하고  세계 재구조화함으로 장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감각장애인으로서  모네 발자취가 멋있어 였던걸까.

문득 그러고보니 청각장애인이 거실에 걸릴 그림으로 어느 화가의 작품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깊은 고민 끝에 ’프란시스코 고야’가 가장 어울리지 않겠냐고 답할 것 같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식을 삼키는 사트루누스(크로노스)’가 있는데, 검은 배경에 식을 뜯어 먹는 크로노스 귀괴분위기를 선뜻 선호 람은 그리 많지 않을  하다. (궁금하면 ’고야, 크로노스’ 검색해보시라)

모든 람에게 (?)받는 모네같은 (인상파) 제쳐두고,   ‘고야’를 내세 이유 ‘고야’이야 말로 청각장애를 얻은   작품이 소리로 대변되는 성의 부조리함을 청각장애인의 예리 각적 감각으로 관찰하여 현실 판으로 나아갔기 문이다. 이점이 같은 청각장애인이었던 운보 김기창의 친일 행위와 철저하게 대비되 점이고, 운보의 현실 인식에  한계라고 겠다. 

란시스코 고야 작품활동이  왕성했었을 30 중반에 청각장애를 얻은 , 이전까지 궁전화가로서 렸던  봉건체제의 찬양에 가까 전통적 풍을 멈추고, 소리 들을  없게  것이 전에는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것을  관찰할  있게 었다는 백을 한다. 이후에 이어지 작품은  놀라운데, 사회 풍자와 판이 득한 [변덕]이라  작품집이 대표적이다. 

‘잠자는 성은 물을 운다’  작품    괴물 그림을 많이 렸는데, 청각에  감각 상실에서  공허함의 분노보다는 각에  현실의 냉정한 인식에서  분노로써 부조리 성의 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그 쟁의 참혹함을 반대했고(’전쟁의참화’ 작품은 작가가 험한 것을  상의 참혹함으로 드러낸다), 이성이 잠들어서 만들어낸 괴물보다, 이성이 만들어낸 물이  험함을 경고를 했었다. 

암튼, 청각의 상실이 스스로 사회 절되고 격리되어 살던 고야 자신의 어두 면을 반영해서인지 30 반에 그려 림의 대부분은어두 경이 색이지만, 말년에는 다시 밝은 색채와 폭에 감싸는 평온한 온기로 돌아 온다. 말년에 이르러 시대와 불화 청각의상실을 정갈하게 갈무리  있었던 걸까. 그렇게   있었던  능할  있었던 이유 엇일까.

이제 봄날이 다가온다. 각자의 집에 걸릴  폭의 림을 뭘로   즐거 민을 볼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