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후보 TV 토론 과정에서 촉발된 수어통역사들의 오역 내지 자질에 대한 일련의 지적은 수어뿐만 아닌 모든 언어의 통번역 과정에서 직역이냐 의역이냐라는 대립구조의 논의의 틀에서 문제의 핵심을 비껴가는 잘못된 문제 설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어통역을 할 때 맞닥뜨리는 근본적인 문제의 핵심은 단순한 '한국어'에서 '한국 수어'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동등한 대칭적인 관계가 아니라, '그 언어를 통해서 말해진 것'이라는 부분에 주목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물론, 수어통역사의 기본 자질-무의미한 습관적 수어 사용 등-는 반드시 짚어야 할 문제라는 것은 동의합니다)
즉, '한국어'라는 순수한 언어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 사회적 헤게모니를 '어떤 방법으로 그와 다른 구조와 특성을 가지는 한국 수어를 통해 말할 것인가?'가 핵심적인 문제겠지요. 결국, 이런 문제는 결국 '서로 다른 언어는 실존적으로 직역을 통해 통번역이 가능한가?' 라는 이차적인 논점으로 나아가게 합니다.'한국 수어'의 통사론적, 화용론적 등 측면에서 인정받고 있는 언어의 지위로서 과연 '한국어'와 동등한 대칭적인 관계 설정을 통해 '통역(직역)'을 할 수 있을까요?
쉽게 말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부여하고 있는 '한국어'의 위상에 어떤 진리나 사태 자체에 독특한 권한을 부여하게 되면, '한국어'로 쓰여진 텍스트는 '한국 수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부여한 것으로 간주되고, 이를 한국 수어로 통번역하는 순간 기존의 '한국어'에서 말하고자 했던 의미의 '훼손'으로 여기게 됩니다.
예를 들어 페북 김상화선생님이 올렸던 1)[통역] 30년 최고 경력의 MBC 수어통역사(청인) 2) [번역] 현영옥 수어통번역가(농인) 의 통번역은 이를 반대로 농인의 수어영상을 '한국어'로 번역을 할 때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언어학자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에 따라 세상 모든 언어는 하나의 심층구조는 무한한 수의 '표층구조'의 문장을 만들 수 있다고 지적한 바와 같습니다.
좀더 부연하자면 '선생님이 나에게 책을 주었다' 라는 의미(심층구조)가 '1)나에게 선생님이 책을 주셨다, 2)선생님이 책을 나에게 주셨다, 3)책을 선생님이 나에게 주셨다' 와 같은 의미는 같지만 표면으로 도출되는 문법구조는 매우 무수합니다. 또한 하나의 표층구조는 수만 갈래의 심층구조(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역으로 농인이 표현한 '한국 수어'를 다른 농인들이 '한국어'로 받아쓰기를 하게 되면 서로가 다른 표층구조로 번역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한국어의 '모임', '집단', '단체'의 어휘가 유사한 개념적인 범주 안에 상주하지만, 실질적인 활용에서 세세한 다른 사회적 관계의 의미를 한국 수어로 통번역할 경우 의미론적 접근을 어떻게 할 것이냐(이를 수어로 직역으로 할 경우 심각한 오역이 발생)는 문제와 더불어 조사의 활용이 두드러지는 한국어 언어 구조를 통번역할 때 어순과 굴절 등으로 조사의 문장 성분을 대체하는 한국 수어의 언어 구조에 어떻게 유사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결국, 수어 통번역과정에서 우리가 1순위를 '직역'이라고 선언할 경우 1차 언어에 대한 절대화와 더불어 그 1차 언어와 통번역 언어 사이의 비대칭적, 위계적 관계가 전제하게 됩니다. 통역 대상 언어(한국어)와 통역 언어(한국 수어)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와 차이는 그 언어들이 함축하고 있는 서로 다른 사유 방식과 세계관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상과 사물의 언어 자체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데 있어 특정 언어의 우월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면, 수어 통역과정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어떤 사태나 사물에 대해 말하고 있는 특정한 언어에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그 언어가 말하고 있는 것을 그와는 다른 구조와 특성을 가진 언어로 말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통역(직역)'에 대한 요구는 서로 다른 언어 사이의 1대1적 대응 관계를 암묵적으로 전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통역(직역)이라는 것 자체가 한 언어의 단어나 문장들을 그에 정확하게 상응하는 하나뿐인 다른 언어의 단어나 문장으로 '치환'하여야 한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인데 저는 이 부분에서 절대 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오히려 수어 통역과정에서 '직역'보다는 '의역'이 대다수임을 우리 농인과 수어 통역사 모두 체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통번역할 때 한 언어의 모든 구성요소들을 그에 상응하는 다른 언어의 그것들로 치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언어의 문장에서 '말해진 것'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거로 다른 언어의 단어와 해석들을 '선택'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수어통역사의 해석과 선택을 통해 전달되는 '의미'와, 농인이 직접 원문(한국어)에서 해석한 의미 사이의 불균형은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고, 이는 농인들로 하여금 수어통역사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겠지요. 저 또한 일상적인 한국어의 수어통역은 신뢰하더라도, '의미의 해석'을 다뤄야 하는 학문적이거나 업무에서는 '한국어'의 텍스트 원본 자체를 선호하는 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궁극적인 수어 통번역은 현실적으로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대안은 없는 걸까요? 저는 몇 가지 측면에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첫째로는 농인이 단순히 한국어 뉴스를 통번역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닌, 농인 언론기자가 생산자로서 직접 뉴스를 취재하고 농인이 직접 뉴스를 진행하는 형식이 우리가 가진 언어의 통번역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중요한 대안이 될 거라고 봅니다. 그러고보니 한국 농사회에서 농인 언론과 농인 기자는 좀 더 활성화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로는 사회현상에 대한 자생적인 농인들의 인식과 판단에 따라 해석한 '의미'를 수어 통역사들은 주목해야 합니다. 즉, 수어통역사가 자의적으로 한국어로서 해석한 의미의 선택을 한국 수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농인이 수용하는 것이 아닌, 농인이 해석한 의미의 선택을 수어통역사가 '통역 과정'에서 수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음성 언어와 시각 언어의 구조적 차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 입니다.
세 번째로는 슬픈 현실이겠지만 농인과 수어통역사 모두 머리를 맞대어 '한국어'와 '한국 수어'의 작지만 의미있는 교집합을 찾으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해야 합니다. 청인 수어통역사의 소리 언어에 대한 경험과, 농인들의 시각 언어에 대한 경험을 수시로 교류하여 접점을 늘이려는 노력만이 궁긍적인 대안이 될 거라 봅니다.
넷째로는 뉴스 현장에서의 텍스트 대본을 미리 수어통역사에게도 제공하여 통번역과정에서의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의미 선택의 오류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부여하거나 농인의 사전 자문을 얻을 수 있도록 시스템의 구조화가 필요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준우 교수의 '농인의 삶과 수화언어'책의 300p에 언급한 정호승 시인의 시 <귀>의 번역의 통찰은 그래서 우리에게 유의미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농인들의 수어문학에 대한 활달한 활동과 수어통역사들의 참여는 긍적적인 시너지 효과가 날 것이라 믿습니다. 더불어, 농교육체계에서 기존의 언어교육의 한계를 성찰하고 이중언어문화(2bi) 교육 방법을 더 고민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겠지요.
암튼, 수어통역사에게는 통역의 현실적인 한계와 그것을 감내해야 하는 부담으로 이번 사건이 괴롭고 껄끄럽게 다가오겠지만 뉴스 통역과정에서 불거진 농인들의 비판적인 지적에 늘 귀를 귀울여야 하고, 농인들의 요구에 대해 개선점을 찾으려는 노력으로 이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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