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15화 중 별이와 기준이의 대화중에 기준이가 어설픈 수어로 말을 건네자, 별이가 '갑자기 네가 왜 수어를 하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는 피상적으로 비장애인들이 농인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서는 '수어'를 배우거나 사용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뒤흔든 중요한 포석이다. 뒤이어 나오는 별이의 대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수어는 농인의 말이다.'
'수어는 농인의 말' 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왜 별이는 수어를 쓰는 기준이에게 짜증나는 듯이 말했을까. 사실 드라마가 진행되는 여러 회차에서 다양한 등장 인물들이 별이에게 간간이 수어를 쓰는 장면이 스쳐지나가지만, 그런 주변인들에게 별이는 '수어는 농인의 말'이라는 당연한 명제를 들먹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기준이에게만 단호하게 그 명제를 내세우며 선을 긋는걸까.
'수어는 농인의 말'이라는 명제에는 수어가 단순히 언어 사용의 유창성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언어적 지위 이상의 그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느 청인이 아무리 ‘수어(sing langage)’를 잘 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농인들이 사용하는 ’수어(Sing langage)’를 사용한다는 뜻과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농인의 감정과 문화 양식을 배제하고 언어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공유되지 않는 감정과 이해로 그 언어를 사용할 줄 안다고 내세우는 것이 얼마나 조소할 일인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지 않으면 ‘언어’가 무슨 소용인가. ‘수어는 농인의 말’이라는 명제를 다르게 표현해보자면, ‘수어는 농인의 유일한 표현 수단’이라고 한다면 수어에 대한 농인의 예민한 반응이 조금 이해가 될려나 모르겠다.
암튼, 별이는 기준이에게 15화 내내 끝까지 수어를 사용하지 않고, 구어로만 이야기한다. 그런 별이에게 기준은 아무리 사랑한다고 얘기를 해봤자 공허한 바람만 서걱거리며 별이 곁을 스치울 뿐이지 않은가. 일전에 수어 아티스트라는 어느 청인의 알 수 없는 무언극을 바라보는 농인들의 차가운 마음도 이 때 별이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덧붙여 '수어는 농인의 언어'라는 말 속에는 기준이가 아직도 농인이 아닌 청인의 관점에서 별이를 바라보고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농인'은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말하는 사람임을 살펴보건데, 기준이도 충분히 '농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이 드라마의 끝이 어떻게 이어질지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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