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살아온 나날, 힘겹던 날

굴레를 벗어나 2022. 6. 27. 20:39

 1980년 4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치솟는 고열탓인지 첫 울음이 들린지 얼마되지 않은 조그마한 신생아의 뇌를 열어 염증 부분을 제거해야 한다는 의사 말에 그 당시 부모님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알 도리는 없었다. 아이가 곧 죽을테니 출생신고를 하지 말라는 주변의 얘기 때문인지, 내 생의 증명은 서류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존재하지 않았기에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친지들 입가에 증명하듯 옮겨졌다. 3개월 후 뒤이어 태어난 사촌 동생으로 인해 나의 생이 흔적없이 소멸되더라도 ‘형’으로서 죽어야 한다는 숙명으로 만들어진 서류상 나의 생일은 그래서 의미가 생겼고, 그래서 의미가 없었다.

 ‘청각장애’라는 진단명은 부모님이 홀로 감당해야 하였고, ‘외로움’이라는 숨겨진 증상은 내가 홀로 감당해야 하였다. 청각장애 학생에게 국어 듣기 시험, 영어 듣기 시험이라는 부조리함을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학창 시절은 늘 삭막했고, 무미건조했다. 체화되지 않은 분노를 어린 마음 심연에 차곡차곡 화석처럼 쌓아두는 법도 그 때 터득했다. 

 11전투 비행단이 대구 근교에 있어서인지 자주 보았던, 지축을 울리며 푸른 창공을 치솟아 오르는 전투기의 굉음이 무척이나 좋았다. 청각장애인이 어느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소리가, 하늘과 날개의 뜨거운 마찰이 소리가 아닌 진동으로 나에게 온전히 쾌감으로 전해졌다. 그래서 나는 파일럿이 되고 싶었다. 

 다만, 길은 이어진 곳을 끝까지 가보기 전까지는 흐릿하여 알 수가 없고, 왜 이런 길로 이어졌는지 그 연유 또한 아득하여 알 수가 없듯이, 창공을 누비는 은빛 날개를 꿈꾸던 길을 벗어나, 교회 목사님의 권유를 들은 어머님의 이끌림에 특수교육과의 길 위를 걷게 된 연유에는 ‘청각장애’라는 거대한 돌부리 이외에는 아득하여 알 도리가 없다. 

 대학 시절은 절망스러웠다. 초등, 중학, 고등학교 내내 수업 40분을 바보처럼 앉아 있다가, 쉬는 시간 10분간 친구의 필기 노트를 빼껴쓰기 바빠 화장실도 쉽사리 가지 못해 마음이 서늘했던 날들이 대학에서도 이어져야만 했다. 강의 시간 내내 외로움이라는 물웅덩이에 내던져진 낡은 시간이 흘러갈수록 내 마음 속의 갈망하는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빈곤함을 채웠다. 

 대학 학생지원처장을 만나 소리지르고, 따졌다. 통역 지원도 없이 대체 무슨 학업을 하라는거냐고. 졸업 자격으로 일정 점수를 획득해야 하는 토익 듣기 시험을 청각장애인이 대체 무슨 방법으로 치러야 하느냐고. 16년간 쌓였던 분노를 그 날 응축된 한 지점에 쏟아붓는 순간, 삼켜지지 않는 목소리는 앞뒤를 뒤채며 두서없이 짐승의 언어로 날 것처럼 흘러나왔고, 흘러나오는 감정을 두 손으로 움켜 잡느라 새하얗게 부들거렸다. 그 날은 긴 시간을 두고 지금도 이따금 파도처럼 밀려왔다가 쓰라림이라는 하얀 포말을 남겨두고 사그라진다. 

 내 몸 안의 비명이 내 몸 밖의 세상을 견디기를 몇 차례 했을까. 어느덧 나와 같은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를 위한 특수학교에 교사로 서게 되었다. 학부모들은 나의 ‘청각장애’를 궁금해 했다. 그리고 그것을 미루어 본인 자녀의 ‘청각장애’와 자녀의 앞날을 짐작했고, 앞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슬픔의 농도와 희망의 가벼움을 가늠했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나의 메말라 푸석해진 마음 갈피는 차마 드러내지 못했다. 허공에 흩어질 가벼운 언어로 개념화되는 그 어떠한 희망도 얘기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학부모의 질문이 엉켜진 마음의 실타래를 하나씩 풀어내게 했다. ‘선생님, 행복하십니까?’ 그 날의 서사는 생경해서 기이했다. 문득, 이해할 수 없는 세상과 이해할 수 없는 내 마음 사이의 불분명한 경계 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싶어졌다. 기진하듯 수많은 책을 탐독했다. 대학원 학업도 이어졌다. 전유된 기억을 인플레하듯 주변 사람과 공유하고 싶어졌다.

 청각장애 후배가 금융 서비스를 이용할 때 ARS인증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고 했다. 청각장애 후배 교사가 장애인 편의지원(통역)이 없어서 교직 생활이 무척 괴롭다고 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장애에 대한 지원’이 역차별이라는 사회의 논리에 막막한 신음만 내고 있었다. 그들의 막막한 신음은 차고도 깊어서 나는 차마 가늠할 수가 없었고,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들의 괴로움이 차고도 깊음을 가늠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들을 위해 나의 애통하는 것으로 나의 지난한 과거를 위로받고 싶어졌다. 이 지독한 청각장애인 삶의 굴레를 끊어내고 싶어졌다. 눈물로 점철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들을 힘겹게 흘러 보냈던 일을 또 다시 내 가슴속에 피어오르게 할 수는 없었다. 

 3여년 가까이 금감원과 인권위, 그리고 언론에 청각장애인을 차별하는 금융기관의 ARS인증 정책을 줄기차게 질타했다. 수많은 금융기관의 ARS인증 정책을 수집하고, 증빙자료를 모아 안내자료를 모았다. 그 이후로 거의 모든 금융기관은 청각장애인을 위해 ‘보이는 ARS인증(대체 문자)정책’을 도입하게 되었다. 

 기진한 몸을 이끌고 소멸되는 하루하루를 ‘장애인교원노동조합(이하 장교조)’에 맥진했다. ‘장교조’에서도 청각장애로 인해 대화에 소외될 때마다 몸에 스며드는 외로움에 화들짝 놀라 불같이 화를 냈다. 그 이후로 노조 안에서 청각장애인과 소통을 위한 통역지원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하나 둘씩 노조 안에서 자기 목소리를 내는 후배 청각장애 교사들이 늘게 되었다.

 어느덧 인생 중반을 지나가게 되었다. 청각장애 아빠를 둔 세 자녀들의 설움이 어떠한지 곡진하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없었다. 놀이동산에서 장애인탑승을 거부하는 차별을 당했을 때, 고속도로 무인정산기에서의 당혹감과 뒤에 늘어선 차들의 신경질적인 경적소리가 온 사방을 휩싸안을 때, 밤중에 가스경보기 음을 계속 울리게 놔둘 수밖에 없었을 때, 나는 내 자녀의 눈을 쓰라려서 바라보지 않았다. 무의미한 소리로 민망함을 감출 뻔뻔함이 나에겐 없었다.

 ‘청각장애’로 이 세상의 소리는 절반도 내 몸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데, ‘청각장애’로 이 세상의 고통은 곧이곧대로 내 몸 안에 스며들었다. 들리는 소리만큼 통증이 드나드는 것이 아니었다. 견딜 수 없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견딜 수 있을 만큼만 내 몸 안으로 받아들이고 싶었음이 자그마한 소망이었다. 꿈결과 같은 인생 전반을 지나 몽환과 같을 인생 후반을 걸어간다. 좀 더 느슨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