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의 삶이 평탄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바람이 부는 것은 필연성은 없으나, 이유없는 바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삶의 진리를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약동하듯 넘치는 햇살이 새파란 나의 청년시절을 힘껏 껴안아도 부족할텐데, 나의 청춘은 지극히 고단했다. 대학시절 장애대학생의 교육권을 위해 전국을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흘린 땀들과, 영원할 것 같은 뜨거웠던 열정은 어느덧 고갈되어 풍화되어 버린지 오래였다. 장애를 가진 것이 한스럽다 여기자니, 되려 메말라 버석거리는 나의 '알량한 자존감'이 아우성이다. ‘영원’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 매고 길 없는 사막을 부유하듯 건너는 괴로운 낙타의 심정이 그러할까.
어느 덧 시간의 바람이 내가 서 있는 교단을 스쳐서, 분노와 체념이 섞이는 그 소리에는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았다.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무미건조한 소리들은 나의 몸속을 가득 채웠고, 나는 그 소리를 해독할 수가 없었다. 나는 해독할 수 없는 그 소리에 실려 가듯이 하루를 맴돌면서 하루의 심연을 가늠했다. 때로는 술이 현실과 이상의 거리를 가려주었다. 술을 마시면 현실이 하얀 이데아였고, 내가 꿈꾸던 이상은 오히려 공허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슬픔은 비빌 곳이 없어서 나의 밑바닥에 쌓였고, 나는 매일을 다시 교단에 서서 새로운 슬픔을 오래된 슬픔 위에 덮었다.
절친 재화샘으로부터 알음알음 서로가 나에게로 다가왔고, 나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 만남의 접점이 ‘장애인교원 노동조합’이었다. 점과 점이 선으로 이어지고, 선과 선이 면으로 이어지면서 그 면은 나에게서 꿈 속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었다. 당면한 교단에서의 고단한 현실과 새로운 세상 사이가 멀고 아득할수록 그들의 이야기는 더욱 절박했다. 세계 최초의 ‘장애인교원 노동조합’은 꿈속이 아니라 눈앞의 강물이 되었다. 나의 몸 안에 쌓였던 무미건조했던 소리들은 그들의 몸에서 힘을 가진 소리로 품어 나왔다.
50여 페이지나 되는 규약집을 보지도 않고 줄줄 읊어대는 위원장의 뒤편에서는 수많은 밤을 지새웠을 고민들과 다짐들이 연이어보였다. 창립총회를 진행하는 모든 이들의 표정에는 우리의 향방에 대해 하나의 멈칫거림도 없는 단호한 결의가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울음 같은 말들이, 말에 미달한 채로 나의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를 일은 없겠구나. 새 날의 기쁨이 저절로 나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뒷풀이에서 들리지 않는 자는 들리는 자의 귀를 빌려 이야기를 나누었고, 보이지 않는 자는 보이는 자의 눈을 빌려 어깨를 짚으며 걸었고, 몸이 불편한 자는 몸이 괜찮은 자의 팔을 빌려 건배를 청했다. 내 평생에 이렇게 수많은 다른 장애를 가진 이와의 만남은 매우 드물었으나, 이들의 만남은 매우 오래된 친구처럼 시끌벅적했다. 다들 살아온 경험의 무늬가 비슷했었던 건지 서로를 이해하는데에 이해의 논리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담배를 피우며 임원들의 곡진한 이야기 속에서 앞으로 헤쳐 나가야 할 칠흑같은 신산한 전인미답의 길을 막연히 짐작하며 헤아려본다. 되새겨보니 우리들 인생에서 쌓인 장애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위원장의 말씀 끝에 뒤따른 짧은 적막은 그래서 더욱 어려웠다. 그 연유로 위원장의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은 번다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다. 긴 시간 장교조 설립과 그 이후의 일을 고민해온 자와 그 시간만큼 숨죽여 지냈던 나와의 고민의 결은 깊이부터가 다를게다. 그저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이키지 않게끔 힘차게 밀고 나갈 수 있게 밀어주는 것만이 오로지 내가 짊어질 부분이다.
집에 와서 총회 때의 일을 되새김질하니 기분좋은 허망한 생각은 비빌 곳이 없어서 간절해진다. 아닌 것이 옳음을 주장하고, 불의가 현실의 권력으로 평등을 유린하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교사로서의 전문성과 장애인으로서의 주체성이 우리들의 목소리와 글자들 속에 살아 움직여 약동하기를. 우리들의 권리를 쟁취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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