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 Philosophy

언어의 통역에 대하여

굴레를 벗어나 2022. 9. 14. 22:35
오늘 학교에서 청각장애 선생님과 함께 수어로 물품용역선정 절차에 관한 업무적인 얘기를 나누던 중에 '견적서' 라는 수어 어휘를 몰라서 지화로 사용했다. 저녁에 문득 '국립국어원 수어사전'에서는 '견적서'라는 수어 어휘가 있는지 검색해보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호기심이 들어서 '노동조합' 이라는 수어 어휘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노동'과 '근로'는 엄연히 철학적인 베이스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한국 수어사전에서는 동일하게 표현한다. 이렇게 되면 결국,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단순히 해당 어휘의 카테고리가 오역을 하게 되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서 언어세계의 위계구조의 질서가 무너지게 된다. 예를 들어 '근로(부지런히 일하다)'라는 어휘는 사용자(자본주의의 지배자)의 질서 개념이 투영되어 있다. 반대로 '노동(자기 몸을 움직여 일하다)'은 일하는 사람의 주체성이 강조된다.
이처럼 헤게모니의 주도권이 어디에 있느냐는 주장이 하나의 어휘에 축적되어 있는데, 이를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런데, 한국수어사전에서는 이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 단순히 서로 다른 어휘의 1대 1대응을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다. 이는 매우 지엽적이다.
중요한 것은 해당 어휘의 개념적 출발이 어디에 두고 있는지를 명확히 구분해야 하고, 그런 출발선에서부터 수어통역, 또는 수어번역이 이뤄져야 한다. '노동'과 '근로'의 수어통역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단순히 모두 똑같은 수어동작으로 사용되어야 하는가. 이대로 괜찮은가.
또한, 농사회의 '근로'와 '노동'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공감이 필요하다. '본인의 업무 수고에 대한 자발성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와 '농인의 자기 노동의 대한 댓가와 주체성을 어떻게 키워나갈 것인가'의 질문은 반드시 농사회 안에서 제기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