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젠베르크는 관찰자의 관찰 행동 자체가 전자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를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하는데, 더 쉽게 예를 들자면 온도계 자체의 열 때문에 물의 온도 그 자체를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다는 격이랄까. 이와 관련된 유명한 얘기로는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있다. 암튼, 이러한 '불확정성의 원리'는 나중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의 한계를 짚음과 동시에 '양자 역학'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장애인 복지와 장애인 교원을 위한 지원'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누군가가 관찰하는 '장애인의 현실'은 그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이준석과 박경석의 토론 장면에서도 익히 보았듯이,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이것밖에 없다'와 '이만큼이나 있다'의 주장은 동일한 현상을 본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현저한 인식의 차이를 드러낸다. 각자의 인식의 세계에 구성되어 있는 '장애인의 현실'은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결국, 불확정성의 원리가 시사하는 바는 절대적인 인식의 틀은 존립이 어려울 뿐더러, 수없이 관찰하면 관찰할 수록 새롭게 드러나는 '장애인의 숨겨진 현실'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규정하는 그 규정이 장애인 현실을 다 알려주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하며 함부로 예단하지 말고, 장애인 당사자의 실존하는 경험에 열린 마음과 지평으로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와 동시에 장애인들도 끊임없이 본인의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그것이 모든 것이 불확실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지혜일지도 모른다. 장애인 복지와 장애인 교원의 지원에 대한 단순한 통계와 수치로 다뤄지는 거시세계의 담론만으로는 상대를 설득시킬 수 없다. 미시세계에 숨겨진 우리 장애인의 삶에서 알알이 새겨 있는 굳은 살의 이야기는 그래서 소중하고 더더욱 드러내야 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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