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적 공간에서의 통역 수단으로서는 수어통역사를 선호한다. 화자와 청자간의 발화에 스며드는 배경과 시기, 장소 등에 따라 유의미하게 달라지는 내용을 캐치하려면, 같은 언어 공간에 경험을 향유하는 수어통역사의 수고보다 더 와닿는 수단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를 정제하고, 개념의 범위를 분명하게 정의지어야 하는 특정한 공간에서는 원어를 그대로 싣어 나르는 '문자통역사'를 선호한다. 이를 테면 학술제나 연수, 회의, 토론 등에서 양자간 인식의 접점을 맞추려면 통역이나 번역을 통해 재해석된 의미보다는, 원어의 그 자체의 직접적인 전달이 의사소통의 수고스러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게다. 특히, 이중언어의 경험과 지적인 수준이 상당한 농인에게는 더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문자통역' 또한 글자에 담긴 의미 그 이상의 시간과 공간의 경험까지 고스란히 전해주지 않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일테면 배경을 전혀 설명해주지 않는체 대화체로 진행되는 소설을 읽다보면 느끼는 곤혹스러움이랄까. 화자가 왜 이런 발언을 어떤 대화의 맥략에서 나왔는지는 오로지 청자(농인)의 추측과 상상에 맡겨야 한다.
암튼, '수어통역'이든 '문자통역'이든 완전한 수단이 아니다.
그래서, 겪는 갈등의 깊이와 상실의 넓이는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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