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위로들

지나간 것은 잊혀지는 마음으로, 다가올 것은 스쳐가는 마음으로

잊혀지는 모든 것들의 총체 62

허다한 말들

일부 비장애인에 의한 청각장애인 설명을 가끔 듣다보면 의아한 부분이 참 많다. 여기서는 청각장애인의 가족뿐만 아니라, 수화통역사 및 자칭 전문가라 일컫는 사람들이 일부 체험한 청각장애의 삶을 전부인 것 처럼 말을 하니, 마치 코끼리 다리가 코끼리 본질로 역전하는 것 같다. 고대 인도의 현자들이 모여 절대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시합(브리모디야)을 펼쳤으나 이 시합은 늘 언제나 침묵으로 끝이 났다고 한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언어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직감하며 통찰의 순간과 함께 침묵이 찾아오지 않았을까. 가끔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자칭 전문가라는 사람들 모아 놓고 '청각장애인의 삶과 정의'에 대해 표현해보는 시합을 치루면 어떻게 될까. 침묵일까. 소란일까.

- Philosophy 2022.01.19

노을

노을이 처연한 이유에 대하여 이과 출신은 이렇게 답할 게다. 빛의 산란과 주파수(파장)별 특성 때문이라고. 태양의 고도가 낮아지면 빛이 대기층을 지나면서 짧은 진동수(파장)을 가진 붉은 색은 산란이 적게 일어나고, 높은 진동수(파장)을 가진 파란 색은 더 많은 산란이 일어나 사라진다. 그러나, 단순히 파장의 짧고 긴 것으로는 이렇게 오묘한 빛깔을 수 놓지는 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의외로 '대기층의 먼지'이다. 먼지가 너무 많으면 하늘이 탁해 보이고, 먼지가 너무 적으면 산란이 크게 일어나지 않아 빛은 그저 단조로워진다. 대기 하나 먼지 하나 없는 우주에서는 오로지 암흑 뿐이다. 그래서, 멋진 노을의 역설이지만 적절한 먼지가 대기층에 있어야 슬퍼서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노을이 완성이 된다. 넘어져 무릎..

- Photograpy 2022.01.19

말이 어눌한 이들을 위한 위로

정보통신수단이 발달하면서 실시간 대면이 가능한 우리 시대에서는 글이 사라지고 말이 득세하게 된다. 여기서 읽은 책과 쓴 글이 말로 쏟아지지 않는 일부 우리들은 영원히 불화를 겪을 수 밖에 없다. 내가 써온 글만큼만 나의 언변이 뒤따라와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은 언제나 사막의 신기루였다. 얼마 전 페친이 쓴 글에서도 나와 비슷한 고충이 묻어나왔다. 집단적 발화 장면에서 왜 나는 후달리는 말빨(?) 때문에 심적 부담이 큰 걸까. 사람 개체마다 다른 개인 성격 또는 자질 차이 때문이라고 넘겨짚기에는 설명이 한참 부족하다. 우리 사회에서 말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선망과 동시에 씻을 수 없는 나의 콤플렉스는 어쩌면 필연적인 요소인걸까. 청인들과 많이 부대껴서 생활할 수밖에 없는 나는 나의 장애와는 별개로 '화려한..

- Philosophy 2022.01.19

사랑하는 딸에게

보이지 않는 ‘추위’라는 것들이 보이는 것을 통해 드러내는 계절인지라 아빠는 여태껏 길가에 떨어진 낙엽의 두께로 ‘겨울’의 깊이를 헤아려 왔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한 해가 저물어 감을 매년마다 다가오는 사랑하는 딸의 종업식으로 헤아리게 되었구나. 푸른 빛으로 싱그러움을 뿜어내던 한 여름철의 자취와 너의 귀여운 모습을 소중한 추억과 꿈들로 남겨두고,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의 마음이 온전히 전해지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깊이 눌러 쓴 글로서 전해 보려 한다. 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없애는 행위는 나무의 자기 성찰이다. 성찰이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 말없이 우뚝 서 있는 나무조차 지니고 있는 삶의 방식이다. 나무가 오래 살 수 있는 연유도 그 성찰을 깊이, 그리고 부단하게 추구하기 때문이겠다. 때로는 그 성찰이 조..

- Philosophy 2021.11.24

소리는 무엇일까?

한낱 ‘광활’이라는 어휘로 감히 규정지을 수 없는 모든 것들의 총체가 ‘절대적인 무’의 틀 안에서 혼조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훗날 과학자들이 ‘빅뱅’이라고 일컫는 폭발이 있었습니다. 그 폭발로 인해 ‘수소’와 ‘헬륨’의 잉태물을 내 보내며 ‘큰 소리’를 냈는데 이를 성경에서는 창세기 1장에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고 표현하고, 과학자들은 원자들의 진동에서 태초의 소리를 찾습니다. 분명한 것은 찰나의 순간이겠지만 세계는 빛(쿼크 입자 충돌)보다 소리(원자의 고유 진동수)가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원자들의 진동(주파수)을 음파를 통해 전달할 기체가 우주에 존재하지는 않지만, 암튼 진동(주파수, 진폭, 위상)이라는 소리의 본질 그 자체는 태초부터 지금까지도 우주에서 장엄하게 울러 펴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

- Philosophy 2021.10.07

이 땅 위 모든 코다(딸)에게 전하는 농인 아빠의 진심('나는 코다입니다'를 읽고)

부조리한 생의 한 가운데서 나의 삶이 평탄하기를 바라는 것 그 자체가 부조리한 것임을 그럴 듯하게 느끼게 될 즈음이었다. 나의 귀에는 '고요'가 악다구니치다 지쳐 '고요'해지다가, '고요'로서 '고요'를 깨뜨린 순간 그 '고요'는 순식간에 들고 일어나 맹렬한 기세로 나의 시야를 가로 막고 가슴을 출렁거리게 했다. 그 '고요' 때문에 나의 심장은 잠시도 '고요'할 겨를이 없었다. 수많은 의문을 속으로 밀어 넣으며 견디기가 평생의 짐이었다. 청각장애를 가진 삶이란, 마치 삭막하고 황량한 사막의 밤 하늘 외로이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부유하듯이 고독하게 건너는 낙타의 심정이랄까. 체화할 수 없는 '분노'와 '체념'이 달음박질 하듯 연이어서 나타나고 사그라지기를, 수미산에 쌓인 돌멩이 수만큼 반복하니 그 흔적은..

- Philosophy 2021.10.07

언어의 다름, 타자화된 청각장애

모든 장애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언어의 이질적인 면이 부각되어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하나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서 전락하여 유독 '타자화'되기 쉬운 영역이 '청각장애와 자폐장애'가 아닐까 합니다. 이는 일반화 오류, 확증편향의 오류일 수 있겠지만, 여러 장애 영역이 어울리는 가벼운 술자리에서조차 유독 '청각장애인'만 소리의 공명에서 투명하게 비껴 가는 것 같은 축적된 저의 경험이 실증합니다. 성인 자폐성 장애인의 특정 행위에 대해 공포나 혐오에 가까운 주변 반응도 그러합니다. 사실, 얼마 전에 장애 차별 철폐를 위한 단체의 회의에 비장애인, 지체장애인, 시각장애인, 그리고 청각장애인인 제가 참석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자통역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매우 당혹스러웠습니다. 회의 시간 내내 저는 의..

- Philosophy 2021.10.07

들리지 않는 자의 외로움에 대하여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자리에는 늘 그들이 쏟아 내놓은 말들로 장벽을 쌓는다. 말로 쌓은 장벽의 두께는 말들의 심연을 가늠할 수가 없고, 그 장벽의 높이는 말들의 깊이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무의미한 말들로 쌓은 장벽은 마치 투명한 것처럼 청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이 아닌 것처럼 위장하여, 귀신조차 잡아내는 조요경마저도 짚어 낼 수가 없었다. 하얀 색 마스크는 장벽을 견고하게 하기 위한 회반죽처럼 철옹성의 위용을 찬란하게 빛내고 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그들에게서 차별받고 있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의 찰나의 고민은 선의를 가장한 차별과, 호의를 등에 업은 무시로 가득 찬 그들의 허다한 말들 사이에 파묻히기 일쑤다. 메마른 사막의 버석거리는 모래처럼 거뭇한 마음 사이로 스잔한 바람이 한바탕 스치운다. 간혹, ..

- Philosophy 2021.08.27

영화 '코다'

'코다(coda)' 영화가 상영되었다. 코다(coda)는 '농부모를 둔 자녀'를 뜻하는 약어다. 사실 코다를 다룬 영화는 '농'을 다룬 영화보다 의외로 더 많다. 아니, 더 거칠게 말하자면 '농인'을 다룬 영화보다 '농인을 둘러싼 객체로서의 주변인을 주체로 내세운' 영화가 더 많을게다. 그 중에 대중적으로 유명한 영화로는 역시 코다 이야기를 다룬 '비욘드 사일런스'가 있고, 청각장애 자녀를 둔 청인 아버지의 '홀랜드 오퍼스', 한국에서는 김진유 감독의 코다로서의 자서전적인 '나는 보리' 영화가 있다. '농인'을 다룬 영화는 '트라이브', '사운드 오브 메탈'이 그나마 조금 알려졌다고 하지만, 그 마저도 '농문화'에 관심이 있는 일부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다른 지면을 통해 다뤄 보겠지만..

- Philosophy 2021.08.15

보청기에 대한 단상

잘 때를 제외하고는 평생을 착용했으니 어쩌면 거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나의 '보청기'에 대해 글을 쓴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살짝 기록을 남겨 본다. 5살 나이 때 동산 병원에 가서 청력 검사를 했었다. 특이하게 생긴 인형과 평범한 장난감이 들어 있는 사방이 막힌 방에 나를 데려다 놓더니, 그 중에 자동차 장난감을 내 손에 쥐어 주고는 밖에 나갔다. 창문 밖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를 지켜 보고 있었는데, 그 때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다시 장난감을 가지고 한참 신나게 놀고 있다가, 어떤 묘한 느낌에 다시 창문을 바라보니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머님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 당시 내가 받았던 청력 검사가 '시각강화청력검사' 였음을 알게 된 것은 한참 세월이 흘러 특수..

- Philosophy 2021.08.11